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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의 반란 Sep 12. 2020

영미누나, 영동대교, 그리고 미디어

우리 사회에서 객관성을 담보로 수많은 일이 벌어지는 현장을 바라봐야하는 직업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극단적인 갈등과 서로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는 문화, 그리고 노골적인 혹은 덜 노골적인 이해관계로 촘촘히 얽혀진 사회를 매일매일 그것도 십수년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흘러왔을까? 주변을 보면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데 왜 우리가 그룹핑이 되고, 집단을 이룰 때 이렇게 우리사회는 달라지는가? 왜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의 종착지도 저기여야 하는가? 


이런 수많은 질문으로 퇴근길의 헛헛함을 달래다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대학교 3학년 때 만난 영미누나.

신학대를 나왔지만 여자라서 목사가 되지 못했었고, 성수동에서 공부방 교사로 일하면서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50여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오후 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을 매일 같이 해내고 있던 누나였었는데, 나와 같이 자원봉사교사로 온 학생들이 보조로 옆에서 그걸 도왔었다.


초등학생들이 끝나갈 때면 중학생들이 오고, 고등학생이 오고 하면서 사실 그 8시간은 정말 길게 느껴졌었다. 

그 사이 점심은 물론 저녁을 먹을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걸 몇 년을 해서 그런지 누나는 깡마르고, 중간에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그 때마다 늘 궁금했던 게 있다. 무엇이 저 누나를 저렇게까지 끌고 가는가? 내가 본 2년의 기간동안 누나는 늘 그랬다. 미안하고 존경스럽고.. 매일매일이 그랬다.


나는 자신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면서까지 저렇게 열심히 지역사회활동을 하는 누나를 볼 때마다 내가 가진 남은 잉여의 에너지 때문에 늘 미안했다. 그래서였던건지 모르겠다. 나는 밤 11시 즈음에 공부방 활동이 끝나면 마음이 헛헛해서 영동대교를 걸어서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때 IMF가 왔다. 생존이 문제가 된 상황에서 많은 자원교사들이 학교도서관으로 돌아갔다. 11명이던 사람은 4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왔다. 처음에는 이런 시기에 자원봉사자들이 온 것이 고맙고 신기했는데, 그들은 3개월을 채우고, 봉사 인증 도장을 찍고 돌아갔다. 


각.자.도.생.

각자가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

그렇게 서서히 공동체의 가치에 헌신하던 것들은 계량화가 되고, 그것이 스펙이 되고, 출세의 발판이 되기 시작한다. 


전공의 특성상 그리고 학교의 특성상 외국을 자주 나가면서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한국은 어떤 나라냐'라고 물어오면 제일 먼저 얘기하는 것이 있었다. "한국은 정이 많고, 이웃들이 좋은 나라야"


IMF랑 코로나 시국을 가끔 사람들이 비교를 한다.

나는 학교에서 이 시기를 지났다.


부모님도 힘들고, 취업할 곳을 갑자기 잃은 대학생들의 공포감도 컸지만

지금 이런 것들보다 내가 기억하는 IMF의 단편이 몇 개 있다.


망해서 밥값 낼 돈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힘내고 사시라고 돈을 쥐어주던 음식점 주인,

나라를 살리겠다고 금을 들고 나온 사람들, 제작비가 없어서 세트없이 종이로 배경을 그린 허술한 무대였지만 모두가 기뼈하면서 박수쳐주고 격려하던 공연장의 분위기.. 이런 것들이다. 분명, 그 때는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사람들과 함께 벼텨온 희망이었고, 공부방의 그 자리에는 그렇게 늘 영미누나가 있었다.


기자로서 우리사회를 수십년을 바라본 나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외모도 스펙, 봉사도 스펙, 부모도 스펙, 사는 곳도 스펙.


나는 책상에서 지식을 구성하는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받은 성적지상주의 교육이 맘에 들지 않았고, 내가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그 자체로 행운이라는 것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뙤약볕에서 일을 할 때에, 누군가 추운곳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일을 할 때, 내가 사무실에서 지식을 구성하는 일을 한다면, 그건 각자도생의 시대에 내가 살아남았다는 결과로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삶을 누리고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응당 우리사회에 돌려주어야 할 빛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든 싫든 내가 해야할 것은 내가 몸담았던 언론과 미디어에 대한 성찰일 수 밖에 없다. 미디어는 소통을 관통한다. 


우리는 과연 20년 전보다 행복한 것일까?

오늘 영동대교가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 길위를 걸어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예전에 걸었던 이 느낌을 지우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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