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드러나고 있는 자녀 스펙 관련뉴스들은 이념을 떠나서 상당히 실망스럽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영국과 캐나다에서 유학을 했고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다르게 성장하는 학생들을 보고 이들이 어떻게 자라는가에 관심히 솔솔히 간다.
그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반대에서 생각나는 두 가족이 있다.
첫번째 가족은 캐나다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20여년 전 즈음에 정착을해서 3명의 딸을 두고 있는 친구 가족이다.
이 가족이 인상 깊었던 것은 비가 쏟아지는 날 함께 했던 캠핑장에서 경험한 이 가족의 교육 방식때문이다.
이날 이 가족은 딸의 학교 친구들을 맡아주기로 했다며 두 명의 백인 어린이들을 데려왔다.
캠핑장으로 가는 내내 비는 쏟아지고, 아이들은 놀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가서 타프 밑에서 비 좀 보면서 멍때리며 쉬다가 오겠구나 했던 생각은 캠핑장에서 바로 바뀌게 되었다.
아이들은 비가 쏟아지는 야생의 숲에 들어가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을 짓겠다고 이내 진흙탕에서 나무를 들고 나르고 뒹구르기 시작했다. 비는 쏟아지고, 날은 춥고, 사실 애를 맡아주는 입장에서 애들이 저렇게 하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떻게 할까 걱정도 들어서 부인되시는 분에게 물었다.
"저렇게 비맞아도 되나요?"
"여기 애들은 다 저렇게 커요. 광대하고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으려면 애들이 강인해야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기가 좀 셉니다. 그런 기 센 애들이랑 나중에 직장생활하고 사회 생활하려면 저렇게 저 정도로 같이 놀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친구의 순해보이는 딸은 캐나다 태권도 대회에서 금메달도 땄고, 가장 인기있는 여러 대학과 학과에서 오퍼를 받았다. 이 친구의 집은 스펙이 아니라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애를 '잘' 길렀다.
두 번 째 귀감을 받은 가족은 영국에 있다.
이 가족은 한부모 가족으로, 이 집도 딸이 셋이 있고 엄마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첫 째 아이가 나이 차가 좀 나는 어린 동생 둘을 하루 종일 돌보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세상 착한 그 딸의 강점 역시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학교 생활을 열심히 했고,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적극적인 성격 때문에 축구부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음악을 좋아해서 꾸준히 한 덕분에, 런던 학생 오케스트라에 들어갈수 있었다. 물론 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좋아서 했고, 교회에서 악기로 봉사활동을 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엄마가 생활비를 벌기위해 시니어 돌봄 활동을 했기 때문에 큰 딸로 엄마를 열심히 도왔다. 이 세상 착한 아이를 세상은 역시 외면하지 않았다. 이 아이도 영국과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오퍼를 받았고 영국 명문대의 좋은 학과에 입학을 했다.
수시라는 것의 도입 취지는 이런 학생들을 찾겠다는 것일 것이다. 대학이 신분사회 레이스에서 도달하는 결승점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끌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오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준비를 하는 것이 수시 전형의 목적일 것이다.
여기서 사회과학분야 박사를 하면서 나보다 어린 교수들을 보면서 좌절할 때가 있는데 그건 한국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어차피 사회과학은 말과 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크지 않다는 생각은 외국에 나와서 크게 바뀐 것 같다. 내가 지금 수업을 받는 사라 교수는 독일인인데, 비엔나에서 박사를 한 뒤, 옥스포드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에서 연구원도 하고, 남미에 가서 연구원 생활을 한 경력도 있다. 그런 스펙 때문에 물었다.
"남미에서 연구를 했다는 건 혹시 스페인어를 하실 줄 안다는 것인가요?"
"네 할 줄 압니다. 남미 공직자 중에는 영어로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분도 계시고, 시민들 인터뷰도 많이 하기 때문에 스페인어가 필요해요"
그 분이 가진 남미와 유럽과 북미의 콘텐츠는 사실 넘사벽이다. 시쳇말로 듣다보면 지식의 양과 최신 업데이트 된 정보의 양 때문에 토가 나온다.
현지어로 그 나라 자료에 쉽게 접근을 해서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능력은 내가 도서관에 들어박혀서 책을 본다고 극복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경쟁은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생존의 능력은 봉사 경력 몇 줄 만들어주고, 논문 실어주고, 인턴쉽 몇 줄 적어준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거기에 부모의 유리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개입된다면 그건 사회정의의 문제를 관통한다.
지금 선진국의 반열에 든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입학 준비를 이런 학원과 컨설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것에 자괴감이 든다.
심지어 지금 외국생활과 견주어 볼 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받았던 한국교육조차 이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보다 교육자료도 심하게 모자랐고, 자료에 접근할 기회도 상당히 제한적이었지만, 그만큼 뛰어 놀 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추억도 많았다. 학교는 많은 실험 관찰도 하게 해주었고, 토론도 재미있게 했었던 것 같다.
방학 때 과제로 받은 탐구생활을 하기 위해 과학관에서 들판까지 헤집고 다녔고, 더우기 나는 운 좋게도 시험 없는 시범학교로 선정된 공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어느 나라 사람들과 초등학교 무용담을 나눠도 아주 경쟁력이 있는 고스펙(?)이다. 우리만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최대한 누렸기 때문이다.
지금 학생들은 내가 경험한 개도국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경제 10위권의 경제대국의 학생들이다. 이들이 교육 제도를 스스로 만들지는 않았다. 교실이데아에 그렇게 열광하던 세대가 다시 자녀들을 교실로 몰아 넣고 더군다나 그 많은 스펙들을 가공하는 모습은 생경하기까지 하다. 부디 낡은 세대의 경쟁 방식과 철학에 이들의 영혼이 물들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면 학교 안과 밖 어느곳이라도, 아무리 작은 무언가라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