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십대의 반란 Jun 02. 2019

영국에서 아이를 키워본다는 것

다양성의 나라 

아이를 영국에 데려가면서 내심 제일 기대했던 것은 다양성이다. 영상기자로서 15년간 만여명의 사람들을 지켜 보면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서로 다르다'라는 점을 다루는 방식인 것 같다. 일단 우리 세대는 반공 프로파간다의 자장안에서 자라난 세대이다. '똘이장군'같은 만화영화에서부터 반공 글짓기나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체제가 다른 북한을 다루는 방식에서부터 우리 세대는 타인과 우리를 단순하게 나누는 방식에 익숙하다. 국내에서도 전라도와 경상도, 혹은 서울과 지방, 서울에서도 강남과 강북 등등 우리는 어떻게든  차이로 사람들을 나누어 묶는데 익숙한 것 같다. 세계가 연결되어 단일국가가 예전과 같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고, 사람과 물건과 정보가 국경을 쉽게 넘는 시대에 이러한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딸을 데리고 가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바로 다양성에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는 것이었다. 16세기부터 이미 다양한 이민족이 엃히기 시작한 영국은 그렇게 단순하게 민족과 인종을 담아 말하는 방식에 많은 비판을 가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하는 '아프리카에서는 가난한 애들이 굻어죽어가고 있어'라든가, '동남아 사람들은 게을러',  혹은 '이슬람은 테러리스트' 같은 개인의 고유한 특질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단순화(over-simplification)해서 부르는 방식은 인종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나는 아이가 바로 우리세대가 가진 타자화(Othering)를 극복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하기에 아프리카의 부자는 물론, 인도의 사업가 혹은 남미의 지식인까지 서로의 삶이 얽히는 런던은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곳에 온 일부 한국 엄마들이 아이들의 영어 교육만 신경쓰거나 백인아이들만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종종 한숨을 쉬게 된다. 런던은 그런 학원이 아니라 지구촌의 다양한 사람들이 얽혀서 서로에게 녹아들지 않고 야생으로 살아가는 공간이다. 



아이를 처음 학교에 데려가던 날.

내가 더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영어유치원 한번 다녀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아빠를 따라 나서는아이를  보며 내가 너무 잔인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빠 따라해봐. 'My name is..." 

"그리고 화장실 가고 싶을 때는 토일렛이라고 해"


두 마디가 아이에게 알려준 영어의 전부였다. 그렇게 보내고 걱정하고 있을 때 학교에서 청천벽력같은 전화가 왔다.


"아이를 데려가셔야 델 것 같아요. 울고 불고 애가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 뒤로도 아이는 한동안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현지 교민분들은 아이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 초반에 누구나 힘들어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통과의례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다른 반 친구들의 엄마에게 허락을 구해서 친구를 집에 초대해서 노는 플레이데이트(playdate)를 하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와이프는 영어가 잘 되진 않았지만, 웃음과 친절함으로 그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친구들 한명한명을 초대해서 학급 친구들과 친해진 딸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가 살던 윔블던의 반에는 영국아이들은 물론, 동양계, 아프리카계, 중동계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딸아이는 더이상 그렇게 특정민족을 통째로 묶어 말하지 않는다. 자기의 동급생인 아프리카의 친구를 보고 자란 아이는 '아프리카는 헐벗고 가난한 나라'라고 부르지 않고, 중동의 아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않는다. 이런 점은 어른인 나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어른처럼 웃는 표정뒤에 무언가를 숨길 수 있는 나쁜 버릇이 없는 어린이어서 그런 것 같다.



미디어 프레이밍 연구나 저명한 심리학자인 엡스타인이 설명하기를 사람들은 접하지 않는 사실을 미디어로 볼 때 영향을 훨씬 더 받는다고 한다. 적어도 딸아이가 우리 세대가 잘 하지 못하고, 아이 세대도 이를 답습할 것 같은, '서로 다른 방식'을 다루는 보다 세련된 방법을 배운 것 같아 기쁘다. 제발 영어를 목적으로 하지 말고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말'로 좀 받아들였으면 싶다. 그렇게 지옥같은 경쟁을 경험하고도 자식에게까지 그 이상의 경쟁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정말 무능한 세대일 것 같다. 


다시 한국으로 오던 날 이별의 순간.





























작가의 이전글 가족과 함께 하는 유럽 자동차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