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한 사람인 줄 알았다.
과묵하고 무게감 있으며, 가벼운 말이나 행동은 삼가던 사람.
그게 내가 처음 본 남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툭 던졌다.
“어릴 때 통지표에 늘 적혀 있었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고.”
그 순간, 내가 믿었던 진중함은 포장지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 포장지의 무늬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고, 내 뇌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해석했다.
확신이란, 종종 착각과 구분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우리는 달랐다는 걸 몰랐다.
나는 떡볶이를 좋아했고, 그는 한정식을 좋아했다.
그는 “맛집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가 분식을 싫어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저 자신의 취향을 나를 위한 배려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정성”이라는 말은, 때때로 아주 이기적인 포장지다.
데이트는 늘 자판기 커피믹스와 담배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나와의 대화를 즐겼고, 나는 추위 속에서 말없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세계에서 나는 '존재해 주는 사람'일뿐, 배려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자답다’고 착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그건 남자다움이 아니라 지독한 자기 중심성이었다.
어느 날 밥을 먹고 밖을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해 잠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내가 얇은 원피스를 입고 추위에 떨자, 그는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씌워줬다.
1초 2초 3초…. 곧 2분도 안 되어서
“다시 돌려주라. 춥다.”
벌벌 떠는 남편이 재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말이지 노 본새가 따로 없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기다리던 백마 탄 왕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도.
한 번은 식당에서 전골을 시켰다.
버너의 점화 손잡이를 돌리자 붉은 화염이 천장까지 치솟았다.
나는 얼어붙었고, 그 사이 남편은 어느새 식당 입구까지 도망가고 있었다.
“혼자만 도망가는 게 어딨 어?”
내 말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럴 땐 무조건 빨리 나와야지. 너는 왜 그렇게 굼떴어?”
그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현실은 위기 상황에서 내 목숨이 먼저라는 사실.
그는 나를 구할 사람이 아니다.
나도 그를 구하러 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뉴스에서 누군가 타인을 구했다는 보도를 보면
나는 뭉클하다 못해 경이로움을 느낀다.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은, 언제나 위대하다.
남편은 사회적으로 인기 있는 사람이다.
밥을 잘 사고, 유쾌하며, 스포츠 경쟁을 좋아하고, 부탁도 웬만하면 잘 들어준다.
그의 철학은 이렇다.
“손해 보고 살아도 괜찮아. 하지만 도와주거나 어떤 일을 하기로 선택했으면 불평은 하지 말아야 해.”
실제로 그는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낸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서도 언제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다.
그는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자기감정에 둔다.
그런 남편에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가정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그는 ‘공주님’으로 변신했다.
설거지 물소리, 빨래 개는 냄새, TV의 배경음…
그에겐 이 모든 것이 편안함이었다.
나는 그 평화의 배경에서 독박 육아와 독박 가사로 지쳐 있었지만,
그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에게 집이란,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나도 아이를 키워주는 아내와 스스로 굴러가는 가정이 있다면
앞만 보고 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워런 버핏도 자녀와 가정을 아내에게 맡기고
온전히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녀들이 자라자, 부부는 따로 살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어쩌면 아내를 너무 혼자 둔 탓은 아니었을까.
생활기록표에서도 느꼈듯이 남편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고, 스스로 가라앉는다.
나는 여러 번 조용히 있는 연습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금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뇌를 의탁할 새로운 자극을 찾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하숙생처럼 집에 들어와 잠만 자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제는 남편에게 겹쳐 보인다.
책도, 여가도, 취미도 없던 시대의 아버지와
모든 게 넘쳐나는 시대의 남편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럴 때, 나는 인간의 미성숙함과 어리석음을 실감한다.
[좀머 씨 이야기]에는 전쟁 트라우마로 매일 밖을 떠도는 인물이 나온다.
지팡이를 짚고 마을을 떠도는 좀머 씨는 죽는 날까지도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모순]의 안진진에게는 집을 버린 아버지가 있다.
결혼했지만 가정을 지킬 준비는 되지 않았던 사람.
결국 자유를 갈망하며 알코올에 의존했고, 행불자로 끝내 자신을 회피하고 부정하다가 결국엔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어서야 가정으로 돌아온다.
남편도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밖으로 나가야 살아지는 사람."
우리는 미숙하고 어리숙하며,
정답을 알아도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존재다.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교육시켜선 안 돼. 사람은 스스로 배워야 해.”
그는 그렇게,
자신이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를 늘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나는 그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누리는 자유에는
그만의 책임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럼에도 내가 슬픈 이유는,
한때 나 스스로를 평강공주라 믿었던 착각 때문이다.
나는 온달을 내조해 장군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의 힘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남편은 온달이 아니었고, 나도 평강이 아니었다.
그저 보잘것없는 인간 둘이 모여,
이름뿐인 부부로, 생활이라는 진흙 속을 밟으며 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은 정신병이야. 도파민처럼 솟다가 다시 가라앉지. ”
“실제로 인간은 사랑을 느낄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살면서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남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니까 더욱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 남는 것은 신뢰밖에 없다고 생각이 든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고, 그 빈자리에 남은 건
지극히 냉정한 가슴과, 누구보다 자립적인 태도였다.
한편으론 반대로 생각해 본다.
이제 와서 남편은, 나를 자랑스럽다고 한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아내가 뿌듯하다고.
어느새 그는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변할 수 없는 내 남편이라는 사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온달장군은 못 되더라도 그 밑에서 농사짓는 백성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그저 내가 공주가 아니었을 뿐.
짚신도 제 짝이 있듯, 그 짝이 내 짝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마음이 진정이 된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느낀다.
아직 끝까지 가보지 않은 내 삶이 겨우 시작이라는 것을.
비록 장군을 만들지 못했지만,
나는 그 옆에 선 부하 근처라도 되고 싶다.
그러니 남편과는 반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끌리는 삶이 아니라,
매일 정해진 일상을 근면하게 살아내는 것. 그 바탕이 만들어져야 새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속에 다시 한번, 나만의 날갯짓을 담아보려 한다.
남편을 바꿔보려던 그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투자하려 한다.
이제는 내가 나를 만들어갈 차례다.
그래서 참으로 나에게 남편이 스승이요 마음의 거울 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