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하려 한다.
하지만 취향이든 신념이든,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바뀐다.
문제는 스스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데 있다.
고정된 자아는 무의식 속 관성에 기댄 착각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유기체다.
살아 있다는 건 끊임없이 반응하고, 변화하는 것.
내 생각과 감정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텐데,
나는 그저 과거의 나에 안주하며 익숙함에 나를 붙잡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
얼마 전, 남편과 4월의 봄을 맞이하며 나들이에 나섰다.
즉흥적인 남편은 여느 때처럼 정중하게 물었다.
“어디 가고 싶어?”
“꽃이 피는 곳, 새로운 데면 좋겠어. 남원이나 구례, 평소엔 가기 어려운 곳.”
하지만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말했다.
“화순으로 가자.”
“거긴 자주 갔잖아. 난 새로운 데 가고 싶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싫은 내색을 한다.
그러나 운전대를 쥔 자가 방향을 정하는 법이다.
남편은 조리 있게 설명했다.
“4월엔 어디든 예뻐. 근데 남원이나 구례는 좀 멀잖아. 가까운 데가 낫지.”
나는 그가 나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질문했다는 착각에 또 한 번 아차 싶었다.
질문은 형식이었을 뿐,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묻는 척하지만, 내 의견을 반영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나도 ‘의사결정에 참여했다’는 형식만 남긴 채, 그는 자기 뜻을 실행한다.
그의 질문은 참여를 위장한 통보다.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책임은 나눠지는 듯한 연기를 남긴다.
질문은 형식일 뿐, 결정은 이미 났는데 왜 질문을 하는 걸까?
이것은 묻는 척하지만 상대방을 참여시켜 줬다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도 너도 낀 의사결정이야 하는 심리적인 책임 분산으로 위장된 소통일 뿐이다.
내가 이 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면, 그는 곧바로 “바가지 긁는다”라고 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나는 또 침묵한다. 역시 남편과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싸움이 꼭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 같다.
남편이 미리생각해 두고 원하는 장소로 가게 되면서 남편의 머릿속에 경로는 나에게 공유되지 않은 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가야 하고 내 머릿속의 경로는 항상 “경로가 이탈되었습니다.”하며 스트레스를 준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단풍나무 군락지였다.
남편은 철쭉이 만개했을 거라고 했고,
나는 아직 이를 텐데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는 나를 꼬시기 위해 “철쭉 보러 가자”라고 했지만, 나는 일부러 속아주었다.
역시나 철쭉은 이제 막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마음이 누그러진다.
남편은 그것도 안다.
내 마음이 풀린 걸 눈치챈 그는,
단풍나무 숲에서 잠깐 산책하자고 했다.
50미터 정도의 짧은 거리를 걷자 그는 또 서두른다.
“사방이 다 아름다우니, 빨리 다음으로 가자. 여기나 거기나 어디든 지금은 다 좋아.” 무슨 꿍꿍이가 있는 양 그는 서둘러 떠나야 한다고 한다.
남편의 차를 타를 조금 더 이동을 하였다.
이제는 수려하고 빽빽한 편백나무 숲이 나왔다.
나는 이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며 다시 또 편백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다리가 아픈지, 숨이 찬 듯 벤치에 앉자고 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계속 외치는 경로이탈 경고음을 꾹 누르고 앉았다. 더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데 마음은 젊고 몸이 늙은 남편의 다리는 왜 자꾸 아프다고 앉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왔으니 내 의견은 묵살하고 철썩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로 솟구친 편백나무는 하늘 가리기 무섭게 생존력을 보여준다.
우리 부부는 나무에 관련된 전공을 했던지라 누구보다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남편은 나무를 돌아보며 설명을 한다.
“편백나무처럼 단일 수종으로 인위적인 식재를 하면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껴, 그리고 이 나무들은 피톤치드를 뿌리며 다른 종이 나올 수 없게 독을 뿜어내고 그 생존력을 강화해.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지극히 자연적이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나 본래 자연적인 것, 다양한 생태계가 공존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것이야. 이런 인위적인 것이 불안정하고 건강하지 못한 거지.”
인간은 이런 숲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다양한 생태계보다는, 정렬된 단순함에 안도한다.
편백나무 숲 사이로 단풍나무 한그루가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 우월한 자태를 뽐내었다.
그 나무는 여러 씨앗을 뿌려 주변에 아기단풍나무들로 넓혀놨지만 조만간 편백나무의 간섭으로 크게 자라지 못하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혹시나 단일 수종으로 디자인된 조경에 우려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공간마다 이곳은 단풍군락, 또 이곳은 편백나무 숲, 그리고 그 주변의 활엽침엽의 숲이 주변을 둘러싸여 있고 그리하여 콘셉트를 나누고 조림을 하는 것이 인간에게 정신과 신체에 유익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모르게 생각보다 엄청난 디테일의 설계가 들어가 있다. )
***
2025년 경북에 유례없는 산불이 크게 났다. 소나무가 유독 많이 심어져 있는 탓에, 그리고 건조한 기후와 겨울의 앙상한 가지 탓에 장장 열흘간의 뜨거운 불길로 많은 피해가 왔다.
활엽수같이 잎이 넓적한 나무는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서 다양한 수종이 심어져야 산불을 예방할 수 있다. 한국 전쟁 후 빠르게 녹화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나무마다 기후와 환경에 따라 차별적으로 심어지기도 한다. 경북에 적합한 수종은 아마도 침엽수였을 것이다. 게다가 하필 건조하고 앙상한 가지가 있는 늦겨울이었다. 강풍이 불면서 불은 삽시간 온 숲을 덮어버렸다.
캐나다의 로키산맥도 침엽수로 거의 이루어져 있다. 십여 년 전에 로키산맥에서 큰 산불이 났다. 한 달 내내 산불이 나고 있었는데 침엽수로 빽빽한 산맥을 둘러싼 숲에서 산불은 진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자연 소멸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나는 그 사실이 무척 잊을 수 없었다.
로키산맥은 고도가 높고 침엽수가 잘 자라는 환경이므로 거의 단일 수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산불이 나도 인간의 힘이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했는지 느낀다.
***
다시 편백나무 숲 벤치에 앉은 우리 부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편은 단일 수종의 인위적 식재는 결국 불안전하고 건강하지 못한 생태계라고 일축한다.
그러므로 규정하는 것은 발전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너는 평생 나를 즉흥적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닌 거구나.'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이나 인터넷만 들여다보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내 안의 굳은 규정들을 하나씩 흔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미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는 “경로 이탈”이라는 신호가 들리지만,
예전만큼 불안하진 않다.
그가 만든 방식에 익숙해져 그가 만들어낸 학습의 패턴이라 무감각 해진 것일까?
분명한 건, 나를 규정하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변화란 게 별거겠나. 투덜대며 한 발짝 옮기는 것부터가 시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