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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아내가 된다는 것, 타인이 된다는 것

시댁과의 행복한 길로 가는 방법

by 바크


시댁과의 행복한 길로 가는 방법



시댁의 언어는 따로 있다.

결혼은 둘만의 문제라고 믿었다.

함께 웃고, 함께 살며, 서로 아껴주는 일.

그러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은 두 사람이 아니라, 두 개의 ‘가정 문화’가 만나는 일이었다.

그중 하나인 ‘시댁의 언어’를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내 마음이 덜 다치지 않았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조선시대의 유산, 출가외인

남편과 시댁은 아내를 ‘출가외인’으로 여겼다.

결혼했으니 친정은 타인이 되었고, 아내는 시댁의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이미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구시대의 유물 아닌가.

우리는 더 이상 조선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법적으로도 부부의 공동기여가 인정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우리 부모님을 타인처럼, 그것도 낮춰 부르곤 했다.

“장인이, 장모가…”

친정오빠에게는 “00 씨”라는 호칭을 서슴없이 썼다.

한 살 아래라고, ‘형님’ 소리는 도저히 안 나온다고 했다.

나는 이런 호칭 문제를 ‘미국식’이라고 넘겨보려 했다.

몇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사이니, 그냥 쿨하게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댁의 언어는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강요되는 노동


시댁 가족모임의 언어는 뚜렷한 위계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며느리는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장소를 알아보고, 숙소를 정하고, 메뉴를 고민하고, 동선을 짠다.

현장에 도착하면 바로 생물 해산물을 조리하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좁은 숙소 싱크대에서 살아 있는 것들을 다듬고 요리한다.

그 사이 시누이들은 자신들의 깨끗한 객실에서 와인을 들고 나와 가족놀이를 즐긴다.

그 후, 며느리가 치우고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쇼핑센터에 가 있거나 공항에 간다.

이런 이중약속은 이제 너무 익숙하다.

시어머니를 위한다며 시간을 낸다고 하면서, 정작 일정은 따로 있는 사람들.

이건 누가 봐도 무례하다.

만약 타인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손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며느리는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


시댁의 언어는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다.

잘하고 싶어 뭔가를 하면 오지랖이라 하고,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내면 다혈질로 치부된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의 생신을 앞두고 시누이가 뒤에서 남편에게 연락한다.

“며느리들에게 서운해.”

남편은 확인하려는 듯 내게 쪼르르 전화를 해서 사실유무를 따진다.

“예전에 누나들 일정 고려 안 하고 여행 날짜를 잡았어?”

이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15년 넘게 수없이 모셔갔던 여행들.

모든 일정을 나 혼자 독단으로 정했다는 말이 가능한가?

그 수많은 여행 중에 무엇이 시누이들이 서운했다고 하는지 나는 동서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기억을 교차하며 확인을 했다.


명절에 일찍 차례를 지내고 어머니와 아들가족들이 펜션을 잡았고 각자 시댁이 있는 시누이들이 참석을 못할 때가 있었다. 당시에 시어머니는 좋은 숙소에 딸들이 오지 않아 얼굴이 급작스럽게 어두워졌고

두 아들들은 시어머니와 소파에 앉아 밤늦게까지 티브이만 바라보았다.

그때 며느리들은 갑자기 분위기 숙연해진 것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어머니가 딸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 그다음 해 생신 때 여행을 추친했고 그녀들은 거리가 멀다는 이유만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동서와 기억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확인했다. 서로 기억하는 맥락이 너무 달랐다. 같은 경험, 전혀 다른 서사였다.

이제 와서 ‘섭섭했다’는 말이 왜 이렇게 쏟아지는 걸까?

나는 되묻는다.

“그 수많은 여행 중에, 어느 하나는 만족스러웠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룸컨디션이 어땠고, 고기 질이 어땠고,

식당 음식이 맛이 없었고,

결국 직접 해 먹은 게 최고였다고.

이런 대화 속에서 나는 지쳐간다. 더구나 시어머니 생신을 앞두고 남편에게 서운하다고 말을 하면 며느리 귀에 안 들어갈까? 어느 장담에 맞추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시누이들이 직접 어머니 모시고 가면 된다.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다.

누나들은 동생들에게 일을 넘기고,

남편들은 아내에게 토스한다.

아내들은 그 공을 받아 안다가 한계에 도달하고,

결국 “더는 없다, 시즌 아웃이다” 선언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시댁과의 관계를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서로 선을 그은 채, 언뜻 화목해 보이지만

결코 다가가지 못하는 관계. 그런데 며느리 입장에서 이 거리가 너무 좋다.

가까이 다가가면 언제 또 날카로운 혀로 찔러댈지 모른다.



나와 당신, 그리고 다른 기준들


얼마 전, 친정 가족과 몇 년 만에 캠핑을 갔다.

남편은 불편해했다.

감성 캠핑은커녕 도떼기시장 같다고.

하지만 자매의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

가족 모두가 모여 밥 한 끼 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다들 불편했지만, 함께 있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

나는 물었다.

“당신도 우리 캠핑 불편했잖아.

모두가 모인 여행에서 만족한 적 있어?

시어머니는 시누이들이 없다고 아쉬워하고,

시누이들은 며느리들이 없어서 엄마가 불편해하신다고 싫어하고,

그런데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우리 가족과 여행 갔을 때 만족했어? 즐거웠어? 모두 그 정도 불편한 감정은 감수하잖아.”


남편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야~ 나는 너무 즐거웠어. 장인 장모님이랑 함께여서 너무 좋았지~”


나는 그 말의 속뜻을 안다.

남편이 왜 그렇게 친정부모님에게 예의를 다하고,

왜 함께 있는 것만으로 기쁨을 느끼는지.

그건 내가 시댁의 언어에 선을 긋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내뱉은 언어로 자신의 집안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봐달라는 것을 그는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나에게 최대한 맞춰주는 시어머니께 늘 감사하지만 모두가 만족하는 여행은 전지전능의 신이 아니고선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음은 당연하다.


서로에게 거리를 허락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예의다.

나는 시댁의 문화에 여전히 이방인이다.

우습게도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로봇이 되어야 그들 안에 가족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감정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우리는 다만 함께 웃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은 방 안에서 불편함을 참아내며 살아간다.

완벽한 룸컨디션도 없고, 모두가 만족하는 여행도 없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거리를 허락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예의다.

인간은 욕심이 많고, 삶은 짧다.

그 짧은 삶을 헐뜯고 미워하며 보내기엔 우리 모두는 너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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