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했고, 곧 타인이 되었다.
[이 글은 개인적으로 결혼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썼으므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나를 믿고 나아가자는 취지로 과거의 경험들을 떠올려 써보았습니다. ]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나는 이해가 간다.
우선 첫째로 결혼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다. 신혼집을 마련하기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솟아버렸다.
두 번째로는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인데 이것은 한국 사회의 가족 중심 문화에 대한 문제가 출산의 부담에 가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경력 단절과 육아, 가사의 책임이 뒤따르는 현실에 부담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시어머니는 딸들을 시집보낸 경험이 있어 며느리 입장도 잘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자마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너도 아들 낳아봐라. 아들 결혼 시키면 또 다르다.” 그러곤 아내의 자리는 희생과 헌신으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부모님만 보아도, 엄마의 일방적인 희생 위에 아빠는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며 살았다. 엄마는 작은 집을 늘 지키고 있었고, 아빠는 떠돌다가 안심하고 들어올 공간인 집에 편안하게 쉬다 몸을 정비하는 곳으로 취급하였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가? 남녀 모두 동일한 교육을 받고, 경쟁 사회에서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제도 속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 ‘희생’과 ‘헌신’이라는 말은 기브 앤 테이크가 분명하거나, 일방적으로 참고 견디는 상황이 아니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똑같이 결혼했지만 아내는 집을 지키고, 남편은 바깥일을 하며 자유를 누리는 옛 방식을 누가 쉽게 동의할 수 있을까?
게다가 어머니 때에는 가사와 부업이 횡행했지만 요즘은 직장과 가사를 도맡아 하는 일은 더욱 책임을 지우는 게 더 무거운 현실이다.
‘졸혼‘이라는 시스템이 등장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 형태가 장점일지 단점일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가족 모델로 분명히 자리 잡고 있다. 부부라는 법적 결속력 아래,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모였다 해체하는 구조는 실리적일 수도 있다.
이제는 '손해 보면 바보다.' 라는 말이 흔한 시대다.
희생과 헌신은 누구 한 사람의 의무가 아니다. 부부는 법적으로 무촌, 동등한 관계다. 그러나 나는 이 ’ 동등’이라는 단어에 대해 큰 오산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불행히도 제도적으로 동등해진 지 오래되지 않았고, 여전히 관습과 관념 속에서는 그 거리가 조금씩밖에 변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대에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우리 어머니시대였다면 꿈조차 꾸지 못했을 테니.
하지만 시어머니는 나를 여전히 과거의 여성처럼 바라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는 현대 여성의 삶을 권장한다. 남편도 살림을 잘해야 하고, 육아도 함께해야 하며, 여자는 사회에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 모순은, 나로서는 참 씁쓸하게 다가온다. 시어머니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얼마나 든든할까. 일방적인 사랑이 부럽기까지 하다.
이제 내가 시댁에서 타인으로 살아온 이십여 년을 돌아보며, 그들의 문화 속에 녹아들고 싶어도 스며들 수 없었던 예들을 떠올려보려 한다.
남편과 한 가족이 된 건 결혼 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여 년의 결혼생활 중 거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였고, 처음 13년 정도는 나는 현명한 아내인 척, 착한 며느리인 척 행동했다.
나는 남편과 내가 머리를 합치면 명문대 나온 사람 하나쯤은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다고 믿었다. 평범한 우리는 협업해야 시너지가 나고, 그래서 나는 남편의 사회생활에 힘을 보태는 것을 당연한 희생이라고 여겼다. 비서이자 아내, 아이의 엄마로서 그의 뒤를 든든히 보조했다.
남편은 그 모든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점점 더 권위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을 좋아했고, 내가 참기만 하면 가정은 평범하게 유지될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나의 불우한 어린 시절, 현실에 체념한 두 형제를 보며 더 굳어졌다. 잘 사는 사람들처럼 살자고 다짐했고, 시어머니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따랐다. 그녀가 이루어낸 가정은 평온하고, 자녀들은 자존감이 높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시어머니에 대해 충분히 존경스럽다.
아무튼 시어머니의 가르침대로 10여 년의 헌신으로 가정을 이뤄냈지만 나는 내 속에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말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모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자신을 믿는 방법을 일찍 익혀야 한다. 나의 자존감은 남이 절대로 채워주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9년, 나는 파워블로거가 되고 싶어 그림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미싱으로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 옷을 만들어 그 과정을 블로그에 올렸다. 점점 이웃이 늘었고, 나도 블로그에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야,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가서 돈이나 벌어.”
그 말에 주눅이 들었다. 반응이 좋았지만 그만두었다. 남편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 기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매일 두 시간씩, 아이들을 돌보며 3주간 공부를 했다.
남편은 말했다.
“그거 과락만 안 하면 되는 시험인데, 너처럼 전력질주하며 기사공부하는 사람을 처음 본다.
라테는 말이야 당구 치다가 이틀 바짝 공부해서 기사 시험 붙었는데 뭘 그렇게 열을 내며 공부하냐? “
그는 자신의 무용담을 털어놓으며 마치 내가 머리가 멍청한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 나는 똑똑한 머리가 아니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고, 결국 한 번에 합격했다.
대학 시절, 알바를 하고 모은 돈으로 1종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그걸 본 남편은 고시공부 하듯 한다며 비웃었다. 결혼 직후, 나는 공무원 시험도 봤지만 떨어졌다. 이후 남편은 나를 멍청한 사람으로 확신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로 남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처럼 멍청한 사람이 다 어디 있을까 생각했지 뭐야…“하고 말이다.
나는 자격증을 땄고, 운전을 하게 되었으며 옥외 광고를 하는 간판회사에 들어갔다.
욕설이 난무하는 현장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일하며 디자인 실전을 익혔다. 디자인 안을 ai처럼 뽑아내지 못해 많이 혼나기도 하고 잘리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말은 거칠어도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사장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 번 돈으로 서울에 유명한 캘리그래피강의를 신청했다. 무려 7주간 주 1회씩 수업을 받으면 수료증이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남편에게 7주간 토요일 오전 반나절에 아이 둘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료증이 나오는 날,
남편은 내게 폭발했다. 그이 말은 이러하였다.
“언제까지 아이를 나한테 맡길 거냐. 수료증은 필요 없어. 결국은 실력이야. 자격증은 실제로 하나도 쓰임이 없어. 안 가도 되는데 굳이 가려고 하냐?”
결국 나는 수료증을 받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된다. 그 결정을 내가 내렸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내가 결국 남편을 설득했어야 했다.
남편에게서 진지하게 시험공부를 임하지 않나, 쓸데없는데 블로그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나, 수료증 같은 거 없어도 실력만 있음 캘리그래피를 할 수 있는데 굳이 받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남편의 생각일 뿐이었다.
결혼은 내 결정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상대방을 설득하고 끝까지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달성할 수있도록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남편들은 아내의 협조를 당연히 하면서 아내가 가정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행위에서는 협조가 아니라 아량인양 선심 쓰듯 베푼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시어머니가 내게 전수한 신념이고 남편은 시어머니의 든든한 방패로 그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만약에 그때 내가 남편을 설득했더라면 남편은 분명 들어줬을 것이다.
내가 거기까지 못 갔으니 결정적으로 나를 믿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
남편은 이미 타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결혼의 제도 안에 묶여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나를 그 안에 한 몸으로 생각을 했다.
부부라도 각자의 삶이 중요하다.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포기하는 단계가 온다. 그 지점에서 서로의 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만약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일심동체라고 생각한다면 서로 서운한 것들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야구에서 보듯이 우리가 원팀으로 경기를 치를 때 말고는 각자 체계적인 훈련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부 중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이 가정을 이룬다는 말을 누가 납득을 할까?
또 부부는 동상이몽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극딜을 하며 희생을 치른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러니 결혼 후에 더욱 타인으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의 삶은 오직 나만이 짐을 줄일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2편- 가까워질 수 없었던,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