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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엄마가 버텨낸 시간

by 바크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고생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떠올릴 때 눈물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었다. 누구의 연민도 필요 없는,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여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엄마를 보면, 포기하지 않는 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아주 어릴 때 엄마는 외조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갓난쟁이 아기와 코 먹은 서너 살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때 나이가 9살, 학교를 들어갈 나이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머리에 짐을 이고 행상을 나가야 했다.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키워야 했다. 외할머니는 억척같았고, 살림을 배우는 과정은 혼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외할머니가 글을 못 읽고 오직 머리로만 의지했기에 엄마는 동생을 업고 학교 창 안을 자주 들여다봤다고 한다. 글자를 배우고 싶어서 단어를 통으로 외우고 집으로 돌아와서 연습을 했다.

걸레질을 하다 손을 멈추고, 마루에 글자를 그려보았다. 마당의 흙바닥에도 나뭇가지로 글씨를 새겼다. 먼지가 묻어도, 작은 돌멩이가 걸려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독학으로 한글을 깨쳤다.


엄마에게 위로 오빠가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더 깊은 두메산골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큰 오빠는 공부를 마저 마치지 못하고 가난 때문에 농사꾼으로 평생을 빌어먹고 산다는 생각 해 술을 달고 살았다.

간에 무리가 생겨 그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둘째 오빠는 집을 나가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곳에 가서 낮에는 공장에 일하고 야간학교를 다니다가 직업군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엄마에게 어린 두 동생과 행상하는 외할머니뿐이었으니 엄마는 이 집을 책임져야 했다.


20대 시절엔 그릇 공장에서 일을 다녔다. 활발한 엄마는 노래자랑에 나가 당당히 대상을 받고 그녀의 젊음은 눈부시게 빛났다.

28살에 노처녀가 되다 보니 27살 아빠를 소개받았다.


겉모습은 단정해 보여서 엄마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려는데 아빠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아빠는 원래 유아독존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모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혼인신고를 감행한다.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자존심이었을까. 무엇이었든, 그 선택은 엄마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 7년을 같이 살다 보니 아빠는 무능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가정 살림에 급여 한번 받아본 적이 없어서 엄마는 아빠의 부탁으로 이 집 저 집 돈을 꾸며 살아야 했다. 성실하게 살았던 엄마는 외상이 마음 깊이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이제 외상을 그만하고 벌어오는 돈을 가져다주라고 한소리를 했더니 이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말이었는지 아빠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 결국 아빠는 자존심이 상해 편지 한 장을 쓰고 집을 떠나버렸다.


엄마는 아이 셋을 두고 갑자기 가장이 되어버렸다.


“엄마, 그래서 어떻게 나가서 돈을 벌게 되었어?”

나는 항상 엄마 옆에서 잠을 잘 때 엄마의 젊은 시절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서 주인집 밭에 일을 나가 일당을 벌었지.”


“그걸로 벌어서 우리 셋을 먹이고 키웠어?”


“아니, 그 돈을 모아서 옥수수를 샀지. 그리고 마을 앞에서 옥수수를 쪄서 팔아서 목돈을 만들었지.”

우와. 어린 마음에 엄마의 생활력에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 TV에서 본 전래동화가 떠올랐다. 최부자댁 며느리 후보들은 쌀 한 말을 받고 석 달을 버텨야 했는데, 두 명은 굶어 포기하고, 한 명만 바느질 일을 하며 현명하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결국 그녀가 며느리가 되었다.

엄마도 그랬다. 가진 게 없어도 방법을 찾아냈다. 빈손으로 시작해 옥수수를 삶아 팔았고, 결국 장사의 기틀을 잡았다.


“엄마,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했어?”


“생선장사를 하면 돈을 번다길래 그 길로 통일호를 타고 목포로 내려왔지. 그리고 명태와 수루메(오징어 : 일본어)를 떼다가 시장에 와서 팔았지.”


“엄마, 그건 너무 무겁잖아? 어떻게 들었어?”


엄마는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왔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다시 눈꺼풀을 떠올렸다. 나는 엄마의 팔을 베고 누워, 그 시절의 엄마를 상상했다. 무거운 생선 상자를 짊어지고,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던 엄마. 지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엄마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 주인집 아들이 자전거를 잘 타길래 그 아이에게 자전거를 배웠단다. 혼자 몇 번 연습을 하고 나니 자전거를 제법 탈만해지더라. 그래서 나무 궤짝에 담은 생선을 받아서 자전거에 싣고 다녔지.”


엄마의 품속엔 은은한 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생선과 땀, 그리고 멈출 수 없던 하루의 흔적 같은 냄새였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흔들림 없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에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에게 거대한 산이었고 따뜻한 방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담임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노트와 연필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친절이 무척 어색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막내딸이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장사를 하는 중에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했다. 반가워서 고등어와 명태 몇 마리를 챙겨드렸다고 한다.

선생님은 아마 나에게 그 보답으로 학용품을 준 것 같다. 나는 아직 부끄러움이 모르는 어린 시절이라 엄마가 나에게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벅찼다.


나는 엄마에게서 상황을 비극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굳건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어쩌다 한 번씩 컴컴한 방안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면 벽에 등을 기대고 서럽게 우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조용히 엄마 품으로 쏙 들어갔다. 내 숨소리가 엄마를 진정시키기를…


나약함을 눈치채지 못하게 그렇게 엄마는 우리에게 강한 모습만 보여주는데 최선을 다했다.

힘든 상황이 오면 엄마를 생각하고 버티는 힘이 생긴다. 엄마보다는 그래도 내 상황이 나으니까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견뎌낸다.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기대고 싶은 딸이다. 하지만 어느새 엄마는 나보다 작아졌다. 어깨는 좁아지고 걸음은 느려졌다.

그렇게 긴 세월을 버텨온 엄마를 보며, 문득 생각한다. 엄마는 정말 열심히,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오셨다고. 그리고 나는, 엄마의 그 힘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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