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습관은 평생을 간다. 고치기 어렵다는 걸 절감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고치기 힘든 행동은 시작조차 말아야 한다.
우리 집 바깥양반을 스무 살 때부터 만나,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켜봤다.
평생의 동반자이자, 평생 나의 글감으로도 충분한 사람이다. 재밌다는 뜻이다.
연애 시절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일면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사랑했다.
우리는 다섯 해를 연애했지만,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커플이었다.
1년에 12번, 5년이면 고작 60번 남짓. 한 사람을 알기엔 너무 부족한 만남이었다.
결혼하자마자 깨달았다.
‘이 사람은 게으름의 선봉자구나.’
나더러 설거지시키면, 차라리 굶자고 하고
가사노동을 분담하자 하면, “그럼 너도 나만큼 벌어와”라는 말로 협박했다.
기저귀 갈아준 횟수는 손에 꼽는다. 특히 둘째는 아예 갈아준 적이 없다.
남편은 가사 전쟁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은 언제나 자정이었다.
나는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했을 것이다.
수익은 변변찮았고, 친정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는 내 눈치를 기가 막히게 읽었고, 그걸 활용했다. 그는 눈치의 장인이다.
“곰 같은 며느리, 여우 같은 아내”라는 말은 여자를 동물에 빗대지만,
정작 여우는 남자다.
남편은 15년 동안 나와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며 우위를 점해왔다.
그의 게으름을 묘사하자면 끝이 없다.
옷장을 열고 옷을 꺼낸 뒤 문을 닫지 않는다.
신발장 문도 마찬가지다.
현관 앞에 재활용 쓰레기가 있어도, 그것을 넘고 그냥 지나간다.
그는 자신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며 외치지만,
그 말은 아내가 집안일을 할 때 자신도 정신적으로 함께 고통받고 있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20년 넘게 ‘문 좀 닫고 다녀’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다.
“너도 불 켜고 나가잖아.”
상대의 약점을 찌르며, 절대 지지 않으려는 그의 고집이다.
나는 그의 습관을 고치길 포기했다.
이젠 관찰자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고, 그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아프리카 초원의 초식동물 같다.
해맑게 풀을 뜯고 다니지만, 실은 맹수가 언제 덮칠지 모르는 초원에서 빈틈 가득한 움직임이다.
그 초식동물이 우리 남편이다.
어느 날, 동창회라며 제주도로 훌쩍 떠났다.
가정도, 자식도, 아내도 없이 혼자 비행기를 탔다. 홀가분한 사람이니까 이해한다.
2박 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바로 월요일 출근까지 강행했다.
‘무리겠지’ 싶었지만, 내 몸이 아니니 간섭하진 않았다.
역시나 화요일부터 앓기 시작했다. 병가를 냈다.
기침을 하며,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 침을 튀긴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나오지도 않는다.
나는 말했다. “식구들 감염시키지 말고 방 하나 정해서 거기서 생활해.”
남편은 안방을 차지했다.
나는 출근하며 말했다. “내가 옮으면 출근 못 하니까, 꼭 병원 가서 약 타 와.”
그는 약을 타서 한 봉지 털어먹었다.
5월 긴 연휴, 원래 우리는 여행을 가려했지만, 그는 집에 남기로 했다.
나는 예정된 마라톤 대회 때문에 서울에 다녀와야 했다.
“아프니까 집에서 쉬고, 나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이 말을 남기고 서울로 떠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낚시하러 나갔다.
“왜 남에게 감기를 옮기러 다녀?” 하고 묻자
그는 “집에 있으면 더 아파. 나가면 아픈 걸 잊을 수 있어.”라고 답했다.
이 사람은, 쉬어야 할 때를 모른다.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움직인다.
결국 탈진하고서야 쉰다.
서울에서 돌아온 나도 몸살이 났다.
비 오는 연휴 내내 마라톤을 뛰었더니, 온몸이 아팠다.
남편은 또 낚시하러 떠났다.
한순간도 집에 있으면 병이 나는 사람이다.
연휴 마지막 날, 남편에게 말했다.
“답답하면 드라이브 가자.”
우리는 둘 다 앓고 있었지만, 기어코 나섰다.
남편의 우울한 태도가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병든 닭처럼 웅크려 있다가,
“나 우울해~~~” 하고 외친다.
집안일은 거들지 않으면서, 집이라는 공간 자체에 불편함을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대신, 그 대가는 무거운 마음이다.
누구도 그에게 가사 분담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누리는 자유는, 무언의 책임감을 남긴다.
그건 끝내 배우지 못했다.
남편을 데리고 숲 있는 곳으로 갔다.
자연 속에서 숨을 돌리고, 돌아와 건강 밥상을 차려줬다.
기운을 차린 그는 또 신발을 신었다.
“차를 정비하고 올게.” 하더니, 강아지와 나를 남겨둔 채 나갔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을 거치대에 꽂은 뒤 유튜브를 본다.
시끄러운 남자 목소리가 밤새도록 울린다.
거실에서 잠든 나는, 그 휴대폰을 끄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남편은 새벽에 기침하며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가래를 뱉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다음 날, 나는 꿀물에 레몬즙을 타서 남편에게 마시게 했다.
“왜 약 안 먹고 그렇게 돌아다녀서 상태만 악화됐냐”라고 묻자
남편도 “몸이 좀 괜찮아지면 나가고 싶어 진다”라고 한다.
그 말, 익숙하다.
예전에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여자보다 일찍 죽는 게 이해돼. 하지 말란 걸 꼭 하거든.
그게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어.”
프리다 칼로를 좋아하는 남편은
디에고가 아무리 나쁜 남자라도, 프리다가 우주처럼 감싸줬다고 말한다.
여자는 그런 우주 같은 존재라고.
하지만 남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프리다도 바람 폈다는 걸.
남편의 속뜻을 나는 안다.
‘네가 프리다처럼 나를 감싸주겠지’라는 기대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조용히 무탈하게 서로 신뢰를 지키며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