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길준과 조희연 등이 왜군을 인도하여 궁성을 포위하고 주위로 대포를 묻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머리를 깍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임금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정병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가 내 머리를 깎는 게 좋겠소”. 정병하가 가위를 들고 임금의 머리를 직접 깎고 유길준이 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인용 글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등장하는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을 내리기 직전 왜국의 위협 속에 진행된 고종이 서양식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삭발 장면이다. 그 당시 전통적으로 우리들은 성인 남자는 상투요 여성은 쪽진 머리였다. 당시 왕실의 솔선수범에 불구하고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분위기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개혁제도여서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유림의 반발과 백성들의 반발로 마침내는 김홍집 내각은 몰락하고 말았다.
일대 사건으로 여겼던 머리 자르기가 지금은 문 밖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이발소와 미장원이 있어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머리를 깎고 싶을 때 깎고 유행하는 모양새로 맵시를 부리기도 한다. 더군다나 사소한 일상의 기분전환을 한다는 이유로 또는 누적된 피로를 푼다고 하여 이 미용업소를 이용한다. 나는 91년부터 대전에 살면서 개인적으로는 한 이발소만 다니고 있다. 마침 직장 앞에 이발소가 있었고 머리를 깎는 이발사의 손길도 괜찮아 지금도 계속 다니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에 이발을 하다가 문득 빛바랜 이용 면허증을 보니 면허 교부일자가 아득하다. 영암군수가 발행해준 날짜가 1965년 11월이다.
참 큰 충격이다. 세대의 구분을 우리는 보통 삼십 년을 한 세대라 셈한다. 단발령을 시작점으로 한다면 3세대가량의 이발사이고 내가 살아온 시간을 온전하게 꿰뚫고 지나간 시간이다. 직장 생활로 미루어 말하자면 남들은 한 번만 쓸 이력을 두 번씩이나 썼다고나 할까? 나는 남보다 조금 늦게 월급쟁이 생활을 시작하였다. 퇴직까지 근무한 시간이 25년인데 사장님은 16세에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손을 놓지 않고 현업에 종사한다. 팽팽한 얼굴로 만났던 40대의 얼굴엔 굵은 주름이 되었고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아들들은 모두 장가가서 손주들의 나이가 내가 만났던 그들의 아버지만큼 한 나이가 되었다. 사장님은 그때나 이때나 그의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은 가위질에 ‘툭’ 박힌 굳은살이 여전하다.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생업은 직업과 다르게 형편과 여건에 따라 바꾸기가 쉬운 말뜻이 있다. 생계를 위하여 하는 일이 꾸준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연속성이 있으면 직업이 된다. 여느 직장인이라 하더라도 한 자리 한 보직으로 오래 근무하기가 어렵다. 사장님은 이발업 하나로 70여 년을 종사했으며 자식들도 잘 키워서 사회 구성원으로 훌륭한 역할을 하게 했다. 한 직종에 종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사업이 잘되어 부가 쌓이면 업을 그만두기도 하고, 건강이나 주변 여건상 마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 잘 나가던 회사가 한순간 기울어지고, 한창 일 할 나이에 병들고 어떤 사유로 퇴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이다.
그의 대여섯 평 남짓한 사업장을 찬찬히 둘러본다. 이발 의자 세 개, 대기 소파 한 개, 머리 감는 세면대는 귀퉁이에 있고 모가지가 비누에 씻겨 유난히 반짝이는 물조리개가 놓여있다. 바닥은 겨울 연탄난로 녹이 스며있다.
매천야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이발사는 지금의 경찰 격인 경무사 허진許璡이다. 그는 순검을 이끌고 칼을 가지고 길을 막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았다.
"백성들은 서울 나들이를 왔다가도 길에 나갔다 하면 상투를 잘렸으니 모두 상투를 주워 주머니 속에 감추고는 통곡하며 성을 나갔다.”
무지막지한 신분의 이발사에서 이젠 한 달간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하여, 기분 전환을 위하여 이발소를 찾는 시대가 됐다. 내가 베컴 머리를 하면 썩 잘 어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