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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13. 2020

생리로 보는 세상

감상노트: 김보람의 영화 <피의 연대기>와 에세이 <생리 공감>

"금기로만 존재했던 피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글이나 짧은 영상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영화적 시간 속에서 온전히 이 피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피의 연대기>는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져야 했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작품을 만나면 괜히 같은 풍경도 더 반짝이는 것만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새로운 것이 되면서 깨달음을 얻는 '낯설게 하기'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매우 즐겁고 반가운 일입니다.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으로 손쉽게 미디어를 접할 수 있지만 그래서인지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정보를 고르는 일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순간이 더더욱 소중합니다.


고등학교 통학길에 있던 대학교 정문에 하루는 붉은 염료가 묻어있는 생리대가 덕지덕지 붙은 포스터가 걸려있었습니다. '남사스럽게 왜 저런 걸 사람들 다 보는데 둘까.'생각하곤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 전시물을 기획한 학생이 하고자 했던 말이 이제와 새삼 궁금해집니다.


여성의 생리혈은 소대변과 동일선상에서 취급받아왔습니다. 저 역시 더러운 것, 숨겨야 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피의 연대기> 생리혈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감독은 생리컵 사용하게 되면서 자신의 질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고, 생리 양이나 주기, 기간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굳지 않은 본래의 생리혈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면서(기존에 접하던 생리혈은 생리대나 탐폰에 있는 각종 화합물과 만나 굳어진 형태가 주였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 배설물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책과 다큐를 본지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 감상을 적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작가의 진지한 태도를 가벼이 여기고 싶지 않아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작가 겸 감독인 김보람 님은 외국인 친구에게 생리대 주머니를 선물했다가 다른 세상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생리를 하지 않을 선택이 당연한 문화와 탐폰조차 처녀막을 걱정하며 죄악시 여기는 문화의 여성이 사는 세상은 분명 다른 곳입니다.


에세이 <생리공감> 마지막 장에서 감독은 (영화에는 담지 못했으나) 촬영 중 미국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산부인과 전문의 할아버지로부터 '생리를 할지 말지는 여성이 선택할 문제이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라는 답변을 듣고 감동하게 됩니다. 저에게도 크게 다가온 부분입니다.

"우리는 '감동'을 받았다. 맺힌 무언가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선택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몸과 필요에 맞춰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선택할 수 있으려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리, 임신, 출산에 대한 인식은 예로부터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전해 내려옵니다. 비밀스럽고, 보수적이고, 타자화되어 있습니다. 엄마 세대 조차 여성이 생리를 하고 때가 되면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배웠습니다.


"여성의 몸은 이제껏 수많은 금기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신에 시달렸고, 타자(남성)의 욕망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기호로 여겨져 왔다. 질은 숨어있어 보이지 않고 무언가에 뚫릴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그 때문에 남성들은 처녀막을 찢고 처녀성을 정복하려는 욕망을 품게 되었다."


타자가 아닌 상태에서 여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몸에 대해 주도권을 발휘하는 것은 자유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생리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할지, 어떤 인생을 꾸려갈지에 대한 답입니다. 피임과 출산과 직결되는 만큼 여성의 생리를 이해하는 것은 가족을 이해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회용 생리대, 면생리대, 탐폰, 생리컵, 여성형 콘돔, 루프, 호르몬 조절 등 다양한 선택지를 통해 여성은 기존의 제약을 넘어 활동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습니다.


'여성적이다'는 표현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여성상에 대해 고민해 보고 스스로 정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달라도 각자 현명한 선택을 하며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더욱 아끼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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