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겨울잠이나 자고픈 가을이다.
2020년 9월의 기록.
선선한 저녁 바람이 솔솔 분다. 가을이 왔다.
여름내 즐겨 입던 옷들을 정리했다. 빨래하고 건조기로 뽀송뽀송 말리니 꽃다발 같다. 이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실제로 즐겨 입는 옷은 몇 개 안 되는 걸 보면 '쓸데없이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구나' 발전 없는 반성이 스친다. 꽉 닫혀있던 옷장도 잠깐 환기도 시켜주고, 안에 향 주머니도 넣어준다. 효과는 미미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감미롭다.
한동안 차도 맛없고 커피도 입에 쓰기만 했다. 원래 이런 맛이었나, 허영심에 맛있다고 둘러댔었나 되돌아보는데 다시금 향기롭고 고소하게 느껴지는 게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그냥 내 마음이 그랬나 보다. 커피와 함께 곁들일 쿠키도 준비하고. 토실토실 살찔 준비도 해보고. 코로나로 인해 제약이 많은 요즘, 이런 작은 일상에도 감사하다.
나는 무척 심심한 사람이라 SNS가 버겁다. SNS에 비치는 화려한 세상은 늘 현실감이 없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타인의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발밑에 애써 심어놓았던 뿌리가 사라지고 공중에 뜨는 느낌이 든다. 상대적 배제랄까, <잉글리쉬맨 인 뉴욕> 노랫말처럼 나만 이질적이다. 가볍고 편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텐데 유약한 마음이 가을바람에 휘청인다.
좀 더 튼튼해지기 위해 책을 편다. 영상물 중 마음에 든 작품들은 일부러 원작을 찾아보게 된다. 영상물로 만들어질 정도면 이미 유명한 책인지라 감사하게도 번역이 된 경우가 많다. 타인의 부지런함에 기대어 감독이 아닌 작가의 세상을 펼친다. 관도 1인용이라고 인간은 혼자 태어나 혼자 간다지만 이런 때는 함께 사는 세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스스로 텅 빈 사람이라고 느껴서 자꾸만 남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러면 마치 내면을 채울 수 있을 것처럼. 사람 사이의 탐색은 서로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책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 얼마든지 들여다보게끔 해준다. 내 입장에선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는데 만족하면 '척'으로 끝난다. 읽은 척, 아는 척, 이해한 척은 방어기제에 불과하고 결국 스스로를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든다. 남에게 내놓을 만한 작품을 지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이 샘솟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위대한 일들.
소설에는 다양한 흐름이 존재한다고 배웠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소설 자체가 지향하는 바와, 독자가 읽어내는 바는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작품 너머로 이어지는 생각은 무한하다. 독자의 세상은 책을 연 사람이 구축하지 않으면 존재조차 하지 않으니, 곱씹어 생각하는 건 작가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폄하는 참 쉽지만 나를 이롭게 하진 않는다. 단 한 소절일지라도, 작품이 나를 어루만지는 순간을 마음에 담는다.
가을이다. 자꾸 가라앉는 마음을 살찌워야지. 산책도 마음대로 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벌써부터 겨울잠 잘 생각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