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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un 30. 2020

나의 방어복

2020년 6월의 기록.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하지만, 사람은 짚신이 아닌걸. 어떻게 모든 사림에게 제 짝이 주어질까. 공장서 나온 빵들도 어떤 것은 불량한데 사람은 더더욱 다르게 빚어지겠지. 꼭 못나서 짝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원래 그렇게 생긴 녀석도 있지. 노년한 딸이 결혼도 연애도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부모는 “우리 딸이 어디가 부족해서!”라고 반응하지만, 꼭 결핍만 이유가 되는 건 아닌걸.


나는 누굴 좋아하면 더 불안했다. 상대방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는지 평소같이 말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고 조언을 받았지만 내가 아는 나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뭘 먹어도 다음날 살이 빠져있던 걸 보면 아마 쓸데없는데 온 신경을 썼던 거겠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울어야 하는 에너지를 자기 방어에 모조리 썼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허영과 가식은 도무지 상대방을 내 영역으로 들여오게 하질 않는다.


노력했지만 가까워지지 못했고,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다. 누군가를 욕심내면 전에 없던 부재가 존재하니 더 외로워졌다. 나에게 고독은 인간의 숙명이지만 외로움은 상황적인 개념이었다. 더 많이 좋아할수록 힘들기 때문에 호감이 생겨도 아닐 거라 자기 세뇌하며 마음을 접곤 했다. 사랑에 대해 쓴 글들을 보면 ‘그래 그렇지, 사랑은 나를 발전시키는 온 우주적 힘이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점점 더 용기를 잃는다. 인정하자면 겁쟁이라 꽁꽁 숨는 것이다. 이런 소심함이 결국 나에게 독이 됨을 안다. 그러나 정말 끝없는 애정을 구하고자 하면 반려동물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라는 영화에는 따돌림을 주제로 한 소녀들의 미묘한 신경전과 감정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는 내내 마음이 쓰라렸다. 나 또한 초등학교 때 따돌림을 당했다. 그 시기에 나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주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 집에도 친구들을 마구마구 초대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내가 뭘 좋아하고, 친구들의 관심사에 대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친하던 무리는 모이면 재잘재잘 쉼 없이 떠들곤 했다. 점점 변질되어 그 자리에 없는 친구들 흉을 보기 시작했다. 나 역시 험담에 푹 빠져있었다. 거기엔 논리도 없고 주제도 없었다. 반성도 없이 배설하듯 떠들었던 것 같다. 나쁘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저 내 욕을 했다고 들리면 그게 잠시 화가 났을 뿐. 부끄러운 기억들 투성이인 어리석은 시절.


교과서에 희곡이 나와 조별로 연극무대를 꾸미게 되었을 때, 우리 집에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었으니 자연스레 친구들을 초대해서 대본을 만들고 출력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어릴 적 나에게 우리 집은 모두가 함께 이용하는 공공재였으니까. 욕심 있는 친구들은 주조연급 역할을 맡았지만 나는 마냥 어울리는 게 즐거워 친구들이 선택하고 남은 역할을 맡았다. 대사도 몇 줄 없고 이름도 없는 ‘아버지’ 역할을 맡으니 그저 퍼주는 것으로 보였는지 부모님이 살짝 핀잔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무리에서 유독 나의 옷이나 행동에 민감한 아이가 있었다. 내가 뭘 사면 곧이어 비슷한 것을 입고 왔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뭐라 하진 못했다. 다른 일정으로 조별 모임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 따돌림이 시작됐다. 조별 모임에 가끔 못 나온 아이들은 나 외에도 있었다. 그러나 따돌림의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친구들을 잃는 것이 두려워 나는 억지로 어울리려 애썼다. 상대방의 무시에도 말도 더 많이 붙이고 집에도 여전히 초대했다. 하루는 친구들을 데려와 집에 왔는데 학교에 두고 온 것이 있어 나만 다시 집 밖으로 나와야 했다. 내 방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기로 했다. 해결하고 돌아오니 문 밖으로 친구들 목소리가 들렸다. 어김없이 내 흉을 보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가장 작은 평수였는데, 집 크기까지 들먹이며 나의 부족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남에게 제대로 화를 내는 법을 모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 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쨍하게 아리던 여름이었다.


학년이 바뀌어 무리가 갈리고 다행히 따돌림은 반년 만에 끝이 났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전만큼 내 이야길 하진 않았다.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는 일도 드물었다. 이사를 가지 않았으니 놀러 다니는 영역은 똑같았다. 나만이 달라져있었다. 어설프게나마 방어복을 갖춰 입은 채로.


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되어서는 좋은 이야기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일도 나쁜 일만큼이나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남에게 큰 관심이 없으니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날씨나 당시의 뉴스를 언급하거나 상대방이 해주는 이야기에 맞장구만 쳐도 시공간을 채울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럴수록 진짜 친구는 만나기 어려웠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시간을 자주 보내는 사람이 모두 다 ‘친구’는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 시켰다. 여전히 ‘친구’는 별로 없다. ‘아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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