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에 가면 그 작가가 살아온 흐름대로 작품이 전시된 경우를 왕왕 볼 수 있다. 고뇌만큼 작가의 세계도 깊어져 초기 작품과 말년의 작품들은 형태도 방향성도 달라져 있는데, 같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뒤틀어져 있기도 했다. 작품 세계의 발전이나 확장을 반영한 말년의 작품이 깊이를 더한 편이긴 했고, 대표작인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가들의 초기 작품이 함부로 누락되거나 생략되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 작품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늘 내가 지나온 흔적들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일기에 관해선 꾸준한 습관도 없었다. 너무 달콤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아주 기쁜 순간은 일상에 자주 없었으니 주로 분에 못 이겨 내 마음을 쏟아내야 하는 일이 생길 때만 일기장을 찾았다. 큰 맘먹고 장만한 단단한 양장본의 노트들은 매해 절반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대학 때 평소에도 기록이나 정리에 매우 능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자신이 쓴 일기를 가끔 들여다본다고 말하는 게신선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여전히 꾸준히 일기를 쓰는 능력은 부럽다.
휴가를 맞아 시작한 방청소에서 오래된 일기장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도대체 뭘 썼나 기억도 나질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펴보게 됐다. 솔직히 딱 초등학교 저학년이 쓰는 그림일기 수준의 글이었다. 단편적인 감상에서 끝나는 단락들은 두 번 읽을 가치가 없었다. 어렸을 때 본 영화 속에서 기억력에 문제가 있던 한 남자는 10분 전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노트에 적었다. 나는 일기라는 게 그런 걸 의미하는 줄 알았다. 단순히 일상을 기록하는 것. 그러나 이제는 사유가 바탕이 되지 않은 글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中
화자는 저녁밥을 먹으려다 흰 공깃밥에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 느닷없이 되돌릴 수 없는 영원에 대해 떠올린다. 철학적 사유는 멀리 있는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에 이미 녹아 있다. 깨달음의 순간은 아주 평범한 것에서도 비롯될수 있지 않던가. 이렇게 접근하면 자꾸 사유를시도해볼 용기를 얻는다.
순간순간의 소중함 혹은 이로 인한 시야의 확장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사고가 도약하는 순간은 모두 그 자체로 아름답다. 개인의 성찰은 세상을 바꾸는 대단한 깨달음이 아닐 수 있지만 그 개인의 내부에서는 우주 대폭발의 국면이니. 매일 비슷한 저녁밥을 먹는 행위라 할지라도 고유의 색채를 얻은 시점에서 이 저녁은 더 이상 평범한 저녁이 아니다.제목처럼 영어로 치면 “The”가 붙은 ‘어느 늦은 저녁’이 될 테지.
이 시의 다음 장면에서 화자가 밥을 먹는행위로 돌아가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범접할 수 없는 깨달음 조차 한 개인의 근간인 일상 속에 있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동시에 이런 깨달음의 순간을 무심코 지나치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해서. 실제로 나태와 피로를 핑계로 지나쳐 버리는 좋은 생각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신적 여유는 늘 부족하고, 흩어진 사유의 조각들을 이어 붙어 나를 완성시키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수다.
사족을 덧붙이면청소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눴던 편지도 함께 발견했는데, 애정과 관심이 바탕이 되었는지 혹은 형식적인 내용물에 불과한지는 금방 티가 났다. 타인의 ‘나를 향한 사유’가 편지의 깊이를 달리한다. 알찬 글을 쓰려면 아직 멀었지만 적어도 알맹이 없는 글을 써서는 안 되겠다고 다시금 다짐해본다.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한강, 회복기의 노래>中
코로나로 세상이 다시금 시끄럽다. 무사히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희생하며 기다렸던 사람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질 위기에 처해있다. 마음 아프다. 이기심은 어디까지 일까. 빛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