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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04. 2020

라이너 노트 : 독립서점 방문기

얼렁뚱땅 견문록


간판 조차도 있는 듯 없는 듯, 길가를 바라보지 않고 대문 기둥 안쪽을 향해있습니다. 입간판도 못 봤어요. 코앞에 마주할 때까지도 맞게 찾아왔는지 의심했습니다.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단독주택과 함께 마당이 나타납니다. 제가 방문했던 것은 2020년 6월 말이었는데, 당시에 청소 중이었는지 늘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식물도 사물도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어 선뜻 들어서기 망설여졌어요. 장사가 목적이면 보통은 더 단정 할 텐데, 그러고 보니 독립서점들이 소매업이라 어렵다더니 여기도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건가, 짧은 걸음 동안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은은하고 소담스러운 간판 속 불빛이 아니었다면 소심한 저는 포기하고 들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주황빛 현관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려면 주인을 불러야 합니다. 책을 파는 곳에 왔을 뿐인데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기분이 들어 약간 긴장됐어요. 늘 그렇듯 보다 훨씬 담대한 와니가 용감하게 벨을 눌렀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발걸음을 돌릴지 망설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문이 열릴 때까지, "정말 눌러도 되는 거야?" "들어가도 되는 거야?"라고 연거푸 물었어요. 사실 함께 온 와니도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을 테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고, 그냥 어색하고 머쓱해서 그랬지요.


곧 검은 반팔 셔츠를 입은 마른 남성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오브제로 꾸며진 공간을 지나 더 안쪽, 좌측의 방으로 안내받았어요. 여기가 바로 라이너 노트, 음악과 글이 함께하는 독립서점입니다. 여전히 초대받은 적 없는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뻣뻣한 채로 두리번거렸습니다.



벽도 테이블도 다 나무로 된 직사각형의 공간에 주인에게 선택받은 책들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조사에서 확보한 정보를 더듬어 떠올렸습니다.


1. 라이너 노트만의 책 소개가 있다.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주제를 바탕으로 설명하는데 능한 편이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슈만과 관련한 책이 여럿 꽂혀 있던 게 가장 기억납니다. 모든 책이 다 일일이 소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책꽂이의 칸으로 영역을 구분해서 다른 주제를 권하고 있었습니다. 강요가 아니라 부드럽게 청유하는 문체가 자연스럽게 책을 열어보게 했어요.


2. 음악 관련 독립서점이다.

》 음악서적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양한 장르의 책이 망라되어있었어요. 주요리는 음악과 음악서적이 맞지만 수필이나 여행책도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여행책을 권하는 섹션도 있었습니다. 음악은 실제로 들을 수 있게 배치해두시기도 하셨고, 더 나아가 소개글을 담은 명반들도 있었습니다. 끝내 쑥스러워 책만 펴보고 돌아왔는데 음악을 감상하고 소장 음반을 선택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면 이 공간의 특색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다면 작은 공간이지만 천천히 두 바퀴쯤 돌고 나니 슬슬 긴장이 풀려서 본격적으로 책을 펴봤습니다. 처음에 안내 후에 별달리 말씀이 없으시던 주인분이 모르는 새 조용히 들어오셔서 에어컨을 켜주셨습니다. 강요하지도 부담 주지도 않는 주인분의 배려가 마치 나그네에게 얼마든지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마음이 아주 편해졌어요. 라이너 노트 서점 안에 '나'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출판사가 여럿 있는데 서점과 참 잘 어울여 그것 위주로 맛봤어요.



즐겨보는 민음사 유튜브 채널에서 김화진 편집자분이 요리책이 사용하는 문체가 좋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 평소에 읽지 않던 분야의 책도 이것저것 펴본 끝에 느낌이 아주 좋은 표지에  따뜻한 문체를 사용하는 책 하나를 와니에게 선물했습니다. 글 속에서 얻게 되는 용기는 삶에 큰 힘이 됩니다. 때로는 직접적인 조언보다도 더 마음에 와 닿곤 합니다. 가드너에게도 취향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특정 식물을 '못 말립니다'라고 표현하신 게 너무나도 귀여웠어요. 편안하게 술술 읽히고, 고 있으면 온실 속에 서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중간에 우연히 펴 본 챕터가 긍정 에너지 뿜뿜이라 선택했습니다.


다른 책은 음악가의 고민과 애환을 담은 수필집입니다. 음악에 대한 저자의 고집과 이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가 느슨한 삶에 날카로움과 치열함을 데워줄 것 같은 책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는 음악회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관객인 저에게는 휴식시간인 인터미션조차 긴장 속에 보내는 음악가 입장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다른 세계 속 제가 감히 범접 못 할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고집은 보이지만 아집은 느껴지지 않는, 고독하지만 마냥 외롭지만은 않은 책이었습니다. 특히 책 제목인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조차 매우 서정적이지요.


"순회공연 때는 시간이 부족해서 공연장 밖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틈이 없다. 대신 나는 물속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는 방식, 웃음, 자유로운 토론, 놀이, 각자가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 또한 타인의 시선과, 알몸과, 자기 위생과 맺는 관계. 지역에 따라 관심을 끄는 몸의 부위가 다르다. 잔물결은 우리가 헛발 디디지 않고 저마다의 몸짓으로 대화하게 해준다. 수영장은 타인과 접촉하게 해주고, 한마디 말없이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나니, 벌써 피아노가 나를 부른다."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렉상드르 타로 씀, 백선희 옮김.>



책을 다 고르고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에 나오니 들어올 때 살펴보지 못했던 여러 오브제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서점 공간 밖으로 나오니 다시 조심스러워져서 일일이 살피진 못했어요. 이쯤 되면 소심도 병입니다. 그러나 와니가 제가 딴짓을 하는 사이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친구는 또다시 제가 못 보고 지나친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책을 꾸려주실 때 즉석으로 큰 도장 같은 롤을 굴려 봉투를 완성해주셨어요. 매번 찍을 때마다 다른 각도, 번짐, 빛깔이 나올 테니 이를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라이너 노트 봉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는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됐어요. 타인을 통해 세상이 넓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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