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나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밤늦게까지 돈 버느라 우리 자매를 챙기기 어려웠던 엄마에게 "나 도서관에 있다 갈 거야."라는 말은 꽤 안심이 되는 지점이었으리라. 말만 저렇게 하고 다른 곳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하며 놀았던 적은 없다. 나는 정말 하교 후 바로 도서관으로 향해 밤 10시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독서가였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이 정도로 도서관을 좋아하는 애라면 학교에서 다독상 정도는 탔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나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 본 적도 없다.
내가 다녔던 도서관은 책을 읽는 종합자료실과 자리표(무료)를 끊어야 하는 열람실이 따로 있었다. 열람실 자리를 하나 맡고 학교에서 가져온 교과서를 펼쳐 놓은 뒤, 정확히는 보기 좋게 세팅한 뒤 종합자료실로 내려와 책장 사이를 산책했다. 낡고 헌 책은 분명 인기가 많은 도서일 테니 망설일 것 없이 골라 든다. 그러나 진득하니 완독 한 일은 없다. 종합자료실 산책이 끝나면 2층으로 향한다. 그곳엔 자판기와 컴퓨터실이 있다. 300원짜리 율무차나 200원짜리 뜨거운 우유를 좋아했던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뽑아 컴퓨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게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 일이라고는 한컴 타자연습밖에 없었다. 소나기처럼 내리는 단어들을 공격적으로 타이핑해 물리치다 보면 한 시간은 거뜬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지하 매점에 가 육개장 사발면을 먹었다. 운 좋으면 옥수수크림빵 같은 걸 먹거나.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는 애 치고 나는 숙제를 곧잘 안 해 갔다. 시험 공부하는 시늉은 좋아했다. 형광펜을 들고 자습서에 무지성으로 박박 칠하는 내 모습이 멋져 보였다. 기출문제를 풀 땐 꼭 해답해설 페이지에 필통을 끼워 받쳤다. 조금만 막혀도 바로바로 해답을 봐 버렸고 난 그것도 공부라고 착각했다. 평균 점수를 75점 이상 넘어 본 적도 없고 특히 수학은 아예 몰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지금도, 영원히 수학은 알 수 없다. x와 y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나는 수학과 작별했다.
그런 주제에 왜 그렇게 도서관에 붙어살았냐 하면 그곳이 10대 청소년에게 허락된 유일한 무료 실내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열 시간을 죽치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공간. 돈을 내라고 하지도 않고 왜 혼자 있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곳. 기본 규칙만 잘 지키면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 평화롭고 공평한 장소였다.
도서관에 있는 동안 나는 슬프지 않아도 되고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고 거짓말하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됐다. 별로인 내 모습과 별로인 가정 형편과 별로인 모든 상황들로부터, 폭력과 폭력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정당했다. 10시쯤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면 열한 시나 자정쯤, 다만 한두 시간 정도만 깨어있다가 잠들면 그만이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세면대도 없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세숫대야와 개미가 벽을 타고 줄지어 이동하는 정사각형의 단칸방을 고작 한두 시간 정도만 견디면 되니 도서관에 처박히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성인이 되면서 점점 도서관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나는 늘 도서관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도서관으로, 번화가에서 도서관으로 그리고 집에서 도서관으로. 명확한 폭력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이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 후로도 나는 도서관에 자주 숨었다. 가슴에 쌓인 분노와 자격지심이 화산처럼 터져버릴 때,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 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혼자 마음이 초조하고 숨이 안 쉬어질 때 그리고 너무너무 외로울 때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히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다닌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늦어도 한참 늦었다. 책들도 나를 보고 쟤도 참 쟤다,라고 조용히 떠들었을지 모른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며 심리학 책에 빠졌고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으며 뇌과학 책에 빠졌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잘 없지만 사랑 이야기도 종종 읽게 됐으며 가끔은 에세이를 통해 남의 삶도 들여다 보고 최근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완독 하지 못하고 반납해 버리는 일도 여전히 발생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책과 아주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다. 독서는 나를 해치지도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다려주고 어디론가 데려가 준다. 이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된 후로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나를 잘 돌봐준 서울 상도동의 '동작 도서관'과 20대 중반을 함께 지났던 안산의 '감골 도서관'과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나와 함께 달려준 안양의 '평촌 도서관'에게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시골 생활을 시작해 울적했던 나를 달래준 충청남도 홍성의 '충남 도서관'에게 앞으로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다. (충남 도서관이 여태 다녔던 모든 도서관을 통틀어 가장 으리으리하고 좋다. 충남 도서관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