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과 자기보호 사이의 갈등

글쓰기의 딜레마

by 우딤



누구든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단정하기 싫겠지만, 나는 우울한 사람이다. 배부르고 등 따신 우울이 아니라 가난과 차별, 트라우마가 키워낸 우울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아직도 세상을 탓하고 싶진 않다. 외양간을 고쳐도 수백 번은 고쳤을 시간이 흘렀으니까.


세상만사에 애정도 흥미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오래도록 애정하는 것은 독서와 글쓰기뿐이다. 그렇다고 남들 입 벌어지게 할 만한 다독가는 아니고 그 이름도 거창한 작가 지망생 역시 아니다. 본인을 작가 지망생이라고 칭하려면 세상에 내놓지 못한 습작이 어쨌든 몇 개라도 있어야 할 것이고 출판사 투고나 공모전에도 열심일 테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쓰고 저장하고 휴지통에 드래그해서 버리는 인간일 뿐이다.


글 쓰는 게 참 좋지만 어렵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어려움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딜레마에 관한 것이다.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인생이 할퀴고 간 자국들을 엄마는 차마 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그건 작가의 깜냥이 아닌 거라고 했다. 아몬드를 읽은 지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저 구절을 달달 외운다. 책을 읽다 보면 종종 나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된다. 내가 쓴 것 같은 문장과 나 같은 문장은 묘하게 다르다. 내 못난 흉터를 단순히 보여주는 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글로 풀어내는 건 할 수 없다. 내 인생을 팔 자신이 없다. 그렇다, 나는 작가의 깜냥이 아니다.


내가 쓰는 글을 거의 우울한 글이다. 상처 자격지심 우울 무력감 무능 가난 허무 이런 것들을 길게 늘어뜨려 거미줄처럼 집을 짓고 나면 부수고 싶어진다. 가루가 될 때까지 짓밟고 강풍에 날려 보내고 싶다. 그렇게 휴지통 아이콘에 갖다 처박은 파일이 수십 개는 된다.


물론 가끔은 어둡지 않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어두운 사람이 밝은 글을 쓰려면 그냥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을 두고 마음가짐부터 바로 해야 한다. 내가 아는 슬픔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겪은 우울과 불안은 꿈이었던 것처럼. 좋은 사람, 밝은 사람, 꼬이지 않은 사람이어야 희망적인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십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어둠이 단 몇 주의 노력으로 걷힐 리 없기 때문에 매번 그런 글을 쓰기에 실패한다. 결국 내가 쓸 수 있는 걸 쓰기로 하고 감정과 기억들을 차례차례 꺼내놓다 보면 나는 끝없는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내 감정과 기억들은 보기 좋게 위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땅을 녹여 깊은 구덩이를 만들어 버린다. 때로는 그 기분이 싫지 않기도 하다. 우울과 자기 연민에 취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 절대 그 글을 완성할 수 없다. 완성하기 전에 이미 지쳐버린다. 상처와 후회를 타이핑하는 게 싫다. 거지 같은 과거를 다시 꺼내서 마주하는 게 싫다. 내 삶과 가장 밀접한 게 이딴 것뿐이라 내놓을 것도 이모양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정말 끝이다. 글쓰기고 나발이고 끝.


글쓰기의 딜레마, 진정성과 자기보호 사이의 갈등. 나는 이걸 아주 오래전부터 겪어왔다. 그러나 이것 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계속 도망 다녔다. 나를 쓰는 것은 아프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것을 쓰자니 모르는 것투성이다. 모르는 걸 쓸 수가 있나? 그렇다면 나는 왜 하나의 결만 느끼며 사는 걸까. 왜 양면을 다 갖추지 못하고 상처만 스스로 후벼 파며 사는 걸까. 어둡기도 하지만 희망찰 순 없나? 상처와 트라우마로 가득하지만 희망적인 글을 쓰는 작가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 그 노력 목록에 자신의 상처를 글로 다 쏟아내는 게 있다면, 아마 나는 영영 못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벼운 글을 쓰자고 마음먹어도 내 마음은 아픈 쪽으로 기운다. 어둠과 자기연민 그리고 죽음이나 후회 따위의 글을 멋지게 써내기로 유명한 작가가 있다면 알고 싶다. 물론 작가의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에세이 보다 픽션이면 좋겠다.


비참하고 아픈 글을 읽는 건 좋지만 내가 그걸 쓴다고 상상하면 책상 밑으로 요란하게 다리나 떨며 눈물 한 바가지 흘리고 기절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계속 어두운 것들로만 기울고, 내가 아는 것도 그런 것뿐이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나를 쓰기엔 너무 고통스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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