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감히 명명하기 어려운

─ 원소윤,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고

by 우동
사진 출처 : 네이트 뉴스

유독 이렇다 할만한 한 줄이 떠오르지 않는 소설이 있다. 다소 복잡하거나 미묘하고 어려운 감정을 다룬 이야기. 살며 수차례 맛보고 엿보아 왔건만 여태껏 내 언어로 정의 내려본 적 없는 감정. 이 소설이 그렇다. 나를 웃고 울게 한 이 아이를 감히 한 줄로 요약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담담한 슬픔을 묵묵히 설명할 만큼 나는 아직 다 자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유머는 인간의 가장 지적인 면모'라는 정희진 작가의 말과 '유머는 절망보다 깊다'는 박혜진 편집자의 말에 백번 동의한다. 아마 이 서평으로 우리는 읽기도 전에 이미 이 책을 다 읽었을지도 모른다.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프롤로그를 읽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자주 웃다 순간 직감했다. 이 소설이 그다지 웃기지만은 않겠구나.


소설을 읽는 내내, 특히 화자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는 장면에서, 나는 이 아이가 지극히 특정한 이미지(물론 작가의 마스크를 알고 있는 것이 큰 재료였겠지만)로 그려졌다. 놀이터에 가면 무리에서 벗어나 모래장 한쪽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자 놀고 있는 검은 단발머리 여자 아이. 같이 놀고는 싶은지 눈은 계속 흘기는 듯 보이는데 선뜻 일어나지는 않는다. 확실히 모래랑 놀고 싶은 걸로 보이지는 않는 아이. 가서 말이라도 걸어주고 싶은데 아이는 내가 반가운 게 아닐 거다. 그리고 이 못난 어른은 한편으로 그런 아이를 그대로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그게 결국 그 아이다운 것이라는 핑계로.


나는 아이가 아이답지 못할 때 큰 측은지심이 든다. 아이가 너무 아이다우면 그것도 그것대로 짜증 날 때도 있지만, 나는 아이라면 최소한의 아이다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진하고, 욕심도 많고, 가끔은 치기 어린 투정도 부리고... 그러니까 너무 어른을 배려하는 아이는 안타깝다는 얘기다. 좀 몰랐으면 좋겠는데,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른 옆에서 눈치 빠른 아이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자라기를 결심한다.


이 초록 표지를 보고 있으니 꼭 아보카도 생각이 난다. 부드러운 연둣빛 살을 두르고 그 속에 나무만큼 메마른 갈빛의 씨를 품고 있는 아보카도.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도 아보카도 등장하긴 한다. 무의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입력된 거였나? 아무튼. 나는 아직 통달하지 못한 이 소설이 능숙하게 두른 농담처럼, 아보카도 야채인지 과일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저 묵묵히 까만 껍질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다.


「바보 친구」와 며칠 아침저녁을 함께했다. 내 검은 에코백 안에서 내 하루에 작은 틈이 생기기를, 그때나마 얼마쯤은 자신을 들여다봐주기를, 이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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