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서기와 밀크티로 비움

by 쓰는 미래

머릿속이 잡념으로 가득 찼다.

시작은 어젯밤 꿈에서부터다.

온갖 시궁창 같은 에피소드들이 꿈속에서 펼쳐졌다.


계속 매달렸지만 떠나갔던 구남친도 등장하고,

은근하게 나를 따돌리던 대학 동기가 나와서 또 나를 따돌리고,

정말 출근하기 싫었던 예전 회사 회의실에 감금돼 있었다.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눈을 뜨니 돌에 짓눌린 듯 가슴이 답답했다.


과거의 흑역사가 꿈에 줄줄이 소환된 것은 현재의 나에게 고민이 많다는 증거다.

꿈속의 에피소드쯤이야 이제 우스울 정도로 현생의 나는 더한 카르마, 즉 업보를 겪고 있다.


무당이라도 찾아가 굿을 해야 할 팔자지만

수중에 그럴만한 돈도 없으니 나는 맨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오늘 아침도 그래서 요가 매트를 펼쳤다.


눈을 감고 가만히 숨쉬기를 시작하는 와중에도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이번 명절에 시댁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르고,

없는 살림에 두둑이 드린 용돈과 외식 비용에

아이 용돈으로 되돌려 받은 금액이 몇 초만에 계산되며 머릿속에 입력된다.

이것저것 계산하니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손해가 막심하다.


추석 이후에 찾았던 절에 왜 이리 사람이 많나 했더니

나처럼 고통받은 며느리 중생들이었나 보다.

여기저기에서 각종 에피소드들이 귀에 들려오는 탓에

나는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연휴 명절 따위 사라져 버렸으면! 나무아미타불!

부처님께는 죄송하지만 속에서 온갖 분노의 말들이 올라왔다.

인산인해를 뚫고 절까지 다녀왔지만 나는 마침내 분노의 신이 된 느낌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요가 매트 위에 서서 108배를 올리듯 수리야 나마스카라를 시작한다.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을 향해 경배나 절을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짧게 태양 경배 자세라고도 한다.


동작은 단순하지만 4세트 이상 반복하면 온몸에 땀이 솟구친다.

고개가 무릎에 닿을 때까지 숙였다가

올라와 플랭크처럼 엎드린다.

등을 한껏 구부렸다가

엉덩이를 들며 쭉 편 다음

다시 동작을 거꾸로 반복하며 원래 자리에 선다.



잡념들을 털어내기에 아주 좋은 단순 동작들이다.

그날의 컨디션이 허락하는 만큼 세트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은 머리 서기로 마무리한다.


머리서기, 일명 물구나무 자세.

여태껏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으나 매일 온 신경을 집중하며 도전하는 자세다.

손을 깍지 끼고 그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으며 엉덩이를 천장으로 든다.

중심을 하체에서 상체로 보내는 게 포인트.

까치발을 서며 무릎을 최대한 가슴 쪽으로 가져오자 목과 정수리에 묵직하게 몸의 무게가 실린다.


다리 하나를 폴짝대며 허공으로 날려 보지만 아직은 무섭다.

앞으로 나뒹굴 것 같고 다리가 넘어가며 허리로 아프게 착지할 것 같다.

오늘도 두 다리를 하늘로 올리는 건 실패했지만

무릎을 공중에 살짝 띄우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피가 얼굴로 온통 쏠렸다가 바로 앉으니 정신이 맑아져 있었다.

가슴에 응어리져있던 쓰레기 같던 감정들도 몸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더니 흩어진 것 같다.


위쪽을 비웠으니 이제 아래쪽도 비울 차례.

요가 후에 마시는 밀크티 한 잔은 유당불내증인 내 속을 '머리서기' 하게 만들어 준다.

한 마디로 속이 뒤집힌다는 말이다.


좀 괴롭긴 하지만 비워낼 필요가 있다.

화장실을 나서며 거울 앞에 섰더니

웬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머금은 여인네를 마주했다.


나에게 요가 후의 밀크티는 완전한 비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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