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빠진 철강 도시의 새로운 꿈
포항역 앞 골목길에서 만난 한 상인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 동네에서 돈을 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다들 빚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15년째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해온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묻어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제철소의 높은 굴뚝에서는 더 이상 뜨거운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 도시의 심장이었던 용광로의 불꽃이 하나둘 꺼져가자, 그 열기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삶도 함께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것은 단순히 한 도시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이 한국 철강에 최대 50%의 징벌적 관세를 때리고, 유럽이 탄소국경세라는 새로운 무역장벽을 쌓아올리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철강 대한민국'의 종말일지도 모른다.
한국 철강은 지금 기묘한 샌드위치 신세다. 한쪽에서는 중국이 저가 공세로 밀어붙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진국들이 환경을 내세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60년간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산업의 쌀'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노후한 고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탄소는 이제 더 이상 성장의 증거가 아니라 지탄의 대상이다. 원료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는 글로벌 공급망이 조금만 흔들려도 휘청거린다. 철강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자동차, 건설 산업까지 생각하면 백만 명 가까운 일자리가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위기가 때로는 가장 창의적인 해법을 낳는다는 것을, 역사가 여러 번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그 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구 반대편, 아마존 강이 흐르는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철광석을 캐내는 나라다. 게다가 전력의 80% 이상을 수력과 태양광으로 얻는 재생에너지 강국이기도 하다. 친환경 철강을 만들기 위한 두 가지 핵심 요소, 즉 자원과 깨끗한 에너지를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약속의 땅'인 셈이다.
여기에 한국이 60년간 쌓아온 철강 기술과 수소환원제철(HyREX) 같은 차세대 기술이 만난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녹색 철강 시장은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55%씩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2024년 38억 달러 규모에서 2034년에는 3,182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커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은 이 거대한 기회를 잡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 독일이 철강 탈탄소화에 10조 원을 쏟아붓는 동안, 우리는 고작 8,800억 원으로 버텨야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Steel as a Service'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넷플릭스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DVD를 파는 대신 영화 감상 경험 자체를 서비스로 제공했다. 철강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단순히 철 덩어리를 파는 것이 아니라, 기획부터 생산, 운영, 사후 지원까지 모든 과정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
브라질 현지 업체가 자동차용 강판이 필요하다고 하자. 우리는 단순히 강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분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품질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환경 기준은 어떻게 맞출 것인지"까지 모든 노하우를 함께 제공한다. 브라질의 풍부한 자원과 한국의 기술력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브라질과의 협력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브라질은 대서양에 면한 거대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유럽으로도, 북미 동부로도 한국에서 가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 메르코수르라는 남미 공동시장의 일원이기도 해서 아르헨티나, 칠레 같은 인근 국가들로 진출할 때도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미국이 우리에게 씌운 50% 관세 족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브라질에서 생산한 철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시아에서 대서양을 건너 보내는 막대한 운송비와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브라질에 단순한 공장 하나를 짓는 것이 아니라, 유럽, 미주, 남미 3대 시장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전략적 허브를 만드는 것이다.
타이밍도 절묘하다. 올해 12월 브라질 벨렘에서 열리는 COP30은 단순한 기후 회의가 아니다. 전 세계가 ESG 기술의 미래를 주목하는 무대다. 한국 철강이 탄소 배출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벗고, 지속가능한 산업의 리더로 거듭났음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 도전은 철강산업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건설, 에너지, 물류 분야가 모두 함께 나서는 '팀 코리아'여야 한다. 브라질은 한국보다 85배나 큰 대륙이다. 철광석 광산에서 항구까지 수백 킬로미터, 수출항까지는 수천 킬로미터를 이어주는 거대한 물류망이 필요하다. 제철소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건설산업은 제철소와 연계된 항만과 도로, 그리고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에너지산업은 친환경 발전소와 송전망을 구축해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한다. 물류운송산업은 산업의 혈관인 도로로 광산, 제철소, 수출항을 서로 이으며 스마트 물류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컨소시엄을 이뤄 유기적인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환경이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곳이다. 나무 한 그루 베는 것도 허가를 받아야 하고, 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배출물은 실시간으로 감시받는다. 자칫 환경 파괴 논란에 휘말리면 전 세계의 보이콧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로 벌채' 원칙을 세우고, 지역 주민들과 이익을 나누는 상생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 단순한 이윤이 아니라 '착한 개발'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럼 국내 일자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번 도전은 오히려 모든 세대의 일자리를 확장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포항에서 평생을 용광로 앞에서 보낸 베테랑 기술자들은 이제 브라질 현장에서 안전과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는 ‘기술 멘토’가 된다. 과거 한국이 광부·간호사·건설노동자를 해외에 파견해 외화를 벌어들였다면, 이제는 경험 많은 엔지니어들이 세계 곳곳에서 산업화의 교사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편 청년 인재들은 국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 디지털 트윈을 통해 브라질 제철소를 원격 관리하고, 예측 정비와 에너지 최적화 같은 첨단 데이터 기반 업무를 수행하며, 차세대 소재 연구개발을 주도한다. 이처럼 세대별 역할이 자연스럽게 분담되면서, 한국 철강은 단순한 제품 수출국을 넘어 글로벌 인재 양성소로 거듭난다.
노후화된 철강산업 부지는 친환경 신기술을 테스트하는 실험장이자 선행기술을 연구하는 글로벌 연구개발 센터로 변신한다. 단기적 아픔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단기적 아픔은 따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미래 산업의 요람이 될 것이다.
한-브라질 협력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브라질 경제가 성장하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같은 주변국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중남미 전체가 안정되면, 지금 미국이 골치 아파하는 불법 이민 문제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다.
경제적 기회가 늘어나면 사람들이 굳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을 이유가 없어진다. 트럼프가 강경한 이민 정책을 예고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기술과 브라질의 자원이 만들어내는 경제 발전은 미국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 산업화 모델'이 아닐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억한다. 전 세계가 함께 부른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그 노래가 화합과 평화를 상징했듯, 이제 우리는 'K-산업화 모델'로 세계와 손잡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더 이상 가격으로만 승부하거나 기존 기술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기술과 표준을 나누는 진정한 파트너십이다.
포항역 앞 그 상인을 다시 만날 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절망하지 마세요. 포항의 뜨거운 경험이 아마존의 푸른 숨결과 만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거예요."
위기는 끝이 아니다. 더 큰 도약을 준비하라는 신호일 뿐이다. 포항의 마지막 불꽃이 아마존에서 다시 타오르는 순간, 한국 철강의 재도약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