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없는 시대를 건너는 법 (2/3)
코로나19가 만든 데이터 수확기
교실이 과거의 성공 공식을 붙잡고 있는 동안, 직장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AI는 원래부터 똑똑했던 존재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묵묵하게 준비해 온 결과다. 그 준비에 마지막 가속 페달을 밟은 사건이 있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출현이 그것이다.
팬데믹 동안 인류는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옮겼다. 회의는 녹화되고, 지시는 메신저에 남고, 보고서는 파일로 저장됐다. 예전에는 선배 옆에 붙어서 배워야 했던 암묵지(暗默知)가 이제는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서버에 데이터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는 암흑기였지만, AI에게는 테라바이트급의 직무 로그(Log)를 쓸어 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성한 '데이터 수확기'였다. 그리고 그 수확된 데이터는 기업들이 AI에게 '직무'를 가르치는 최초의 교과서가 되었다.
기업들은 이 데이터를 놓치지 않았다. 외부 AI가 우리 회사의 기밀을 빼갔다는 첩보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기업 스스로가 자사의 보안 울타리 안에서, 직원들이 쌓아 올린 회의록과 메신저, 업무 매뉴얼과 실적 데이터를 자체 AI에게 학습시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당신이 회의록을 쓸 때 AI는 보고서의 구조를 익혔고, 당신이 메신저로 협의할 때 AI는 업무 패턴을 배웠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AI는 충실히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우리가 쏟아낸 문장들이 모두 입력값이 되어, AI는 우리보다 더 유려한 보고서를 1초 만에 출력했다.
그 순간 많은 직장인들이 깨달았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
아마존의 예고편, 한국의 본편
몇 해 전, 아마존과 구글이 수만 명을 해고했을 때 우리는 그 뉴스를 '먼 나라 이야기'처럼 넘겼다.
'미국 실리콘밸리니까. IT 기술기업이니까. 우리는 아니겠지.'
그러나 그 파도는 생각보다 빨리 태평양을 건너왔다. 2025년, 한국의 대기업 뉴스를 보면 이제 결이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건 내부 고발이 필요한 사건이 아니다. 누구나 검색창에 몇 개의 단어만 넣어보면 확인되는 현실이다.
대기업 이름 하나를 적고, 그 옆에 'AI 도입' '디지털 전환' '희망퇴직' '조직 슬림화'를 차례로 붙여 넣어보라. 삼성은 '브리티 코파일럿'으로 업무 시간을 줄였다고 홍보하는 기사 옆에서 비상경영을 선언하고, SK는 '에이닷'을 키우고, LG는 '엑사원'을 개발하고, 롯데는 '아이멤버'를 내세운다.
각 그룹의 AI는 이미 산업 현장에 스며들었다. 문서를 정리하고, 회의록을 요약하고, 기획안을 작성하고, 생산과 물류, 영업의 의사결정까지 보조한다. 홍보·마케팅·데이터 분석에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똑같은 이름의 그룹사들에서 '희망퇴직'과 '조직 재편' 기사가 연달아 올라온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직접적 인과를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현상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 냉혹한 '동시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기업은 AI로 '업무 혁신'을 이루려 하고, 그 혁신의 이면에서 '사람의 비용'을 다시 계산하고 있다. 책상 앞에 남아 있는 직장인들은 이미 알고 있다. 회사 안의 그 편리한 도구가 질문하는 자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되지만, 답만 기다리는 자에게는 냉혹한 '지우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2023년 아마존의 뉴스는 예고편이었다. 2025년, 우리의 일자리는 이제 본편의 무대가 되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알고리즘의 판결
AI가 우리의 업무를 학습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제 AI는 그 학습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직장인은 더 이상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대신 AI의 대시보드를 본다. 알고리즘은 당신의 메신저 응답 속도, 문서 작성 시간, 프로젝트 기여도를 분석해 점수를 매긴다. 그 앞에서 '맥락'은 사라진다.
알고리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데이터다.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유가 팀 내 갈등 때문이었든, 예상치 못한 외부 변수 때문이었든, 그 모든 맥락은 분석 모델에게 '노이즈'일뿐이다. 결국 화면에는 차가운 한 줄만 남는다.
'성과 저조.'
설명도, 맥락도, 사정도 없다. 이것이 알고리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무언의 권위다. 많은 이들은 지금의 변화를 'AI가 일자리를 위협하는 시대'로 읽는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동시에,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드문 시간이기도 하다.
위기는 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는 순간이다.
사유하는 인간, 추론하는 AI
직장인들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능력이 있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많이. 그러나 그 자리는 이제 기계의 몫이 되었다. 성실하게 정답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책상을 지킬 수 없다.
'추론'은 AI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산적 패턴을 도출하는 과정이고, '사유'는 인간이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며 문제의 본질을 겨누는 능력이다.
AI는 주어진 문제는 기가 막히게 풀지만,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는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다. 'AI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곧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라는 가치 판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가치는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이 정한다.
흥미롭게도 《트렌드코리아 2026》은 AI 시대의 핵심 역량을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로 규정한다. AI가 자동화한 작업 흐름의 마지막 결정을 결국 인간이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AI가 '추론'을 담당한다면, 인간은 '무엇을 왜 추론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존재라는 선언이다.
나는 AI에게 글을 '써달라'라고 하지 않는다. 글의 구조와 흐름, 문제 제기와 결론의 자리까지 전체 콘티는 늘 내가 먼저 짠다. 어떤 문제로 시작해 어느 지점에서 꺾고, 어떤 결론으로 향할지, 마치 스토리보드를 그리듯 뼈대를 먼저 세운다.
그리고 주요 골자와 문장을 AI창에 입력하고, 마지막에 "너도 알지?"라고 덧붙여 툭 던지면, AI는 "알고 말고요"라고 답하듯 내가 만든 골조 위에 필요한 설명과 근거, 풍부한 배경을 덧채워 초안을 완성해 간다. 초안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날 즈음, 나는 AI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는 너도 궁금한 걸 물어봐. 논리의 빈틈이나 미심쩍은 지점이 있다면,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질문해."
AI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왜 이 구성이 꼭 필요합니까?"
"여기서 말한 리더십의 정의가 너무 추상적입니다."
"이 논리에는 비약이 있습니다. 연결 고리는 무엇인가요?"
나는 그 질문 하나하나에 답한다. 마치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일의 '왜'를 설명하듯, 글의 의도와 숨은 맥락을 차근차근 밝힌다. 그러면 AI는 그 답변을 받아 내가 그려놓은 콘티 위에 정교한 선을 긋고, 내가 던진 문장 골조에 맞춰 서사에 색과 질감을 더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나는 목적을 정하고, AI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단을 계산한다. 나는 가치를 판단하고, AI는 그 판단의 근거를 분석한다. 나는 맥락을 부여하고, AI는 그것을 서사 속 적절한 위치에 배치한다.
나는 AI를 글을 대신 써주는 도구로 쓰지 않는다. AI는 내 사고가 글로 옮겨질 때 필요한 자료, 논리 검사, 팩트 체크, 확장 설명을 맡아주는 지적 파트너다. 나의 사고를 더 깊게 밀어 넣고 더 넓게 펼쳐주는 동반자다.
정답을 복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AI와 논쟁하며 숨어 있는 위험과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사람. 그리고 그 결과물을 다시 사회와 나누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이 문명사적 전환기를 건너갈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AI가 더 똑똑해질수록 인간은 더 깊이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내가 살아온 시간, 몸으로 부딪친 경험, 그리고 흔들림 속에서 쌓아온 세계관이다.
결국 사유의 기반은 언제나 '경험'이다. 문제는, 그 경험이 대부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