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선 불안 증후군'

우리는 편도 5억 원짜리 기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by 우드코디BJ

십수 년 전 일이다. 공장의 늦여름, 습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아침이었다. 제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무거운 원목을 제재기에 올리는 ‘쿵’ 하는 충격음이 바닥까지 울렸다. 곧이어 톱날이 부빙가를 켤 때 퍼지는 특유의 달큰하면서도 약간 쿰쿰한 향이 공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조심스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화 한 통도, 메일 한 줄도, 사전 약속도 없이. 그냥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여기 혹시 사람 안 뽑나요?"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눈빛은 주저하지 않았다. 공손히 모은 그의 손에는 이력서조차 없었다. 나는 기계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데리고 공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시끄럽다고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고, 돌아가는 톱날이 켜는 목재를 한참 동안 눈으로 따라갔다. 거친 표면 그대로인 목재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 보더니, 살면서 갓 제재된 나무는 처음 만저본다면서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그는 주말마다 아버지와 함께 공장 뒤쪽에 있는 산을 자주 올랐다고 했다. 오르내리는 길에서 우리 공장 입구를 여러 번 스쳐 지나갔고, 담장 너머로 쌓여 있는 원목 더미와 창고 안의 목재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회사 이름을 검색하고 블로그를 읽다 보니, 언젠가는 꼭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날 점심, 직원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오후에 사장님과 만난 그는 결국 채용되었다. 이력서는 출근 후에야 작성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일이 단순한 별난 채용담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마치 정해진 규칙처럼, 모두 같은 레일을 따라 취업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것을.


그날 이후, M대리처럼 스스로 회사 문을 두드린 구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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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선 불안 증후군 (Derailment Anxiety Syndrome)


취업 사이트를 통해 회사 메일함으로 날아오는 구직자 소개 이메일을 보면, 종종 기묘한 단절을 느낀다. 지금은 M대리가 찾아왔던 그때보다 정보가 수천 배는 더 많은 세상이다. 검색만 하면 회사 위치, 운영 시간, 생산 품목, 심지어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후기까지도 바로 뜬다.


회사 문은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어김없이 열린다. 그런데 구직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과 스마트폰 액정 안에서만 움직인다.


수십만 개의 채용 공고가 스크롤을 타고 흐르지만, 정작 회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발길은 끊겼다. 한때 사무실 문마다 붙어 있던 ‘잡상인 출입금지’ 팻말조차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더는 막아야 할 방문객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십 개의 회사가 입주한 건물 1층 카페에서, 오늘도 누군가는 노트북 화면 속 ‘지원하기’ 버튼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중소기업은 사람이 없어 기계가 멎는 시간이 많은데, 청년은 일자리가 없다며 어딘가에서 한숨을 쉰다.


사람을 구하는 회사는 오늘도 문을 열어두는데,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채용 앱을 들여다보고, 취업박람회장을 돌며 "들어갈 곳이 없다"라고 하소연한다.


이 기이하고 슬픈 풍경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하나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순간을 사고처럼 느끼는 감각, 레일 밖의 공간을 공백이 아니라 절벽으로 여기는 감각.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길의 탐험이 아니라 ‘경로 이탈’로 인식되는 심리.


나는 그것을 ‘탈선 불안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핸들을 돌리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동차가 아니라, 정해진 노선만 달리는 열차처럼 여기도록 훈련받아온 게 아닐까.


그러나 이 ‘탈선 불안 증후군’의 영향은 취업이라는 첫 관문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삶 전체로 번져간다. ‘적정한 나이에 결혼하지 않으면 낙오자’라는 압박, 집을 사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는 보이지 않는 규칙, 육아에도 정답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끝없는 체크리스트.


레일은 직장을 찾는 길에만 깔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이정표마다, 그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궤도가 이미 놓여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인생을 선택의 연속이 아닌, ‘정해진 코스’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기차는 누군가 미리 설정한 레일 위로만 달린다. 레일을 벗어나는 순간, 기차는 자유가 아니라 전복을 맞는다. 산업화는 공장을 세웠고, 교육은 레일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레일 위에서만 미래를 찾고 있다. 길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말 것, 한번 벗어나면 끝이라는 믿음이 교실과 학원과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 레일 위에는 입시와 수능, 토익과 학점, 인턴과 공모전, 자격증과 채용 사이트가 끝없이 줄지어 놓여 있다. 수십만 명이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인간 기차놀이처럼 보인다. 그 줄에서 벗어나 공장 문을 직접 두드리는 일은, 마치 지금 진행 중인 기차놀이의 규칙을 어기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성공 확률이 절반에 가깝다 해도, 몸으로 부딪힌 실패는 기록으로 남는다. "사람 안 뽑아요"라는 한 마디, "약속도 없이 왜 왔느냐"는 반응이 두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성공 가능성이 0.1%에 불과한 온라인 지원을 택한다.


취업 사이트의 광클은 안전하다. 문전박대당할 가능성은 제로다. '귀하의 역량은 뛰어나지만…'으로 시작하는 불합격 메일은 읽고 삭제하면 그만이다. 화면을 끄는 순간 그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사라진다. 몸으로 겪지 않은 실패는 상처는 남기지 않지만, 의미 있는 경험으로도 남지 않는다.


수백 곳에 이력서를 보낸다. 면접 학원을 다닌다. 카페 한편에 앉아 시간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취업 사이트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 중 몇 명이나 실제로 채용됐는지. 면접관도 말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떨어졌는지.


약 48만 명의 장병이 오늘도 국토를 지키고 있다. 약 63만 명의 취준생이 기약 없는 취업 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중소기업은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 비현실적인 괴리감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든다.


편도 5억 원짜리 기차표


이 거대한 불안을 비용으로 환산해 보면 풍경은 더 또렷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아이 한 명을 대학 졸업까지 키우는 데에는 국가와 가정을 합쳐 ‘약 5억 원’이라는 추정이 흔히 거론된다.


여기서 5억 원은 정밀 통계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사회로 나오기까지 사회가 지불하는 총비용을 가늠하기 위한 상징값이다.


그럼에도 이 숫자가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만한 비용 구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이 돈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우선 이 시스템의 본체인 공교육 재정은 연간 90조 원을 훌쩍 넘는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방비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 연간 30조 원 안팎의 사교육 시장이 가세한다. 국내 자동차 한 해 내수 시장과 맞먹는 규모다.


취업 준비생들이 스펙을 쌓는 데 쓰는 비용은 이미 개인의 부담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


국방비보다 비싼 학교, 자동차 산업과 맞먹는 학원, 영화 산업만 한 스펙 시장. 우리는 이 거대한 비용 구조를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장 통로’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통로는 어느 순간, 스펙을 공급하는 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 자체로 바뀌어버린 것은 아닐까.


5억 원이라는 거대한 비용을 들여 한 사람을 길러냈지만, 정작 문이 열려 있어도 ‘내가 두드려도 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세대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청년 개인의 탓이 아니다. 아이의 몸은 자랐지만, 시스템은 그 몸에 맞는 ‘야성’을 키울 틈을 주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의 무기력이 아니라, 야성을 길러내지 못한 시스템의 실패이며 우리가 함께 조장한 거대한 낭비다.


정상에 올랐더니, 깃발 꼽고 있는 AI


이 비극의 정점은 따로 있다. 우리가 5억 원을 들여 20년 동안 피를 말려 가며 만들어낸 것은 대부분 정해진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었다. 주어진 문제에 오답 없이 답안을 채워 넣는 능력, 매뉴얼대로 성실하게 반복하는 능력.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오류 없는 성실한 ‘인간 AI’를 만드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꿈의 종착역’이라고 믿었던 대기업 문 앞에 서는 순간, 세상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일은 챗봇과 로봇이 합니다."


보고서 작성과 데이터 정리, 시장 조사와 기획안 초안, 마케팅 문구의 초벌까지. 예전에는 신입이 밤새워해야 하는 노동이라 여겨졌던 일들이 이제는 생성형 AI 챗봇의 기본 기능이 되었다. 아이들이 목숨 걸고 쌓아 올린 스펙은 대부분 이 영역에 몰려 있다.


결국 20년과 5억 원을 들여 길러낸 능력은, 공교롭게도 AI가 등장하자마자 가장 먼저 대체된 ‘정답 처리 능력’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성실한 ‘인간형 정답 처리기’로 키워온 것이다. 마차를 모는 마부를 기르는 데 평생을 쏟아부었는데, 그들이 졸업하는 날 마구간에 서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전기차 충전기뿐인 꼴이다.


이것은 단순한 취업난이 아니다. 이미 AI로 새판 짜기가 시작됐는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옛판’에 모든 자원을 베팅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잔혹한 진단서에 가깝다.


포장도로 위에서 배운 정글


이 모든 엇박자 속에서 우리가 가장 뼈아프게 놓친 것은 ‘야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거칠게 으르렁대는 투지가 아니다. 사회라는 예측 불가능한 정글에서, 공식 지도에 없는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감각이다. 매뉴얼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해법을 만들어내고, 넘어졌을 때 툭 털고 일어나 다시 방향을 잡는 근본적인 생존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20년 동안 아이들에게 정글 생존법 대신, 포장도로 위에서 안전하게 달리는 법만 가르쳤다. 야성이 자라야 할 자리에 두려움을 심었고, 본능이 움트어야 할 자리에 정답지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풍경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방구석에서 소비하는 야성


우리가 이탈을 얼마나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갈망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한때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TV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과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다. 평일 내내 안전한 레일 위에서, 5억 원짜리 스펙이 무용지물이 될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주말 저녁이면 가장 안락한 소파에 누워 정답이 없는 야생의 공간을 탐닉했다.


화면 속 사람들은 집 짓는 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비를 피할 처소를 만들었고, 도구가 없으면 만들어 썼다. 실패하면 다시 시도했다. 그곳에는 불합격이 없었다. 오직 생존과 시행착오만 있을 뿐이었다.


그 거친 날 것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와 다른 일상인데 어디서나 삶은 이어지는구나.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 되는구나. 인간은 원래 맨손으로도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 존재였구나.


우리는 잃어버린 야성을 직접 회복하는 대신, 화면 속 타인의 야성을 구경하며 대리 만족하는 ‘방구석 야성’에 머물렀다. 모험은 TV에서 소비되고, 일상은 다시 레일 위로 돌아갔다.


야생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면 누구는 다시 책가방을 들고, 누구는 다시 넥타이를 매고, 좁디좁은 취업 사이트와 사무실 칸막이 사이, 그 안전하고도 숨 막히는 레일 위로 돌아갔다.

음모가 아니라 관성이다


이 모든 일에는 악당이 없다. 거대한 음모도 없다. 현장에서 보면 이 구조는 30년간 축적된 관행에 가깝다. 누구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모는 자식이 낙오자가 될까 봐 5억 원을 썼고, 학교는 낡은 금형으로 똑같은 제품을 계속 찍어냈으며, 기업은 경로를 밟아온 성실성과 근면성을 보고 졸업생을 채용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합리적 선택을 했다. 그 합리들이 모여 거대한 관성이 되었다. 그리고 관행으로 자리 잡아 집단 최면을 걸었다. 이 경로가 성공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세상은 이미 바뀌었는데 시스템만 멈추지 않고 굴러가고 있다.


이 길이 최선임을 증명하는 표지는 없었으나, 주변의 모든 풍경과 속도가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마치 이탈하면 낙오자가 되는 듯, 벗어나면 일탈이 되는 양. 그 결과가 지금 눈앞의 풍경이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일


나는 때때로 그날을 떠올린다. M군이 특별했던 건 남들보다 뛰어난 스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문제를 설정하고(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자료를 수집하고(회사 이름을 검색해 블로그를 읽고), 현장을 관찰하고(산을 오르며 담장 너머 건조목의 결을 보고), 가설을 검증했다(문을 두드려 직접 물어봤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탐구’라고 배웠다.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치열하게 사회를 공부했으면서, 정작 사회에 나가서는 왜 탐구를 멈추는가.


사탐은 배워 놓고, 정작 사회는 검색만 하는 꼴이다.


수능 1등급을 받으려 그토록 애썼으면서, 정작 진짜 사회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채용 사이트만 스크롤한다.

채용 사이트는 정답지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정리해놓은 목차일 뿐이다. 진짜 사회는 화면 밖에 있다.


인터넷에 회사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그 정보를 스크롤만 하지 말고, 탐구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 그 청년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정보를 ‘탐구’로 전환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이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시 곳곳에 ‘중장년 채용 페어’, ‘시니어 취업 박람회’라는 현수막이 걸린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든 레일을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모두가 다시 레일 위에 올라타기 위해 줄을 선다. 이 공식 앞에는 ‘세대 차이’가 없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현실 속 사회를 탐구하는 능력이라고 믿는다. 담장 너머 쌓인 목재를 보며 '내가 배우며 좋아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고, 온라인을 검색하며 '내가 바라는 회사의 모습인가'를 확인하는 시간. 검색으로는 나오지 않는 회사의 분위기를 발품으로 읽어내는 행동력.


AI는 온라인에 축적된 데이터를 학습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 데이터가 되지 않은, 날것의 오프라인 현장에 뛰어들 수 있다.


경험은 검색이 아니라 모험에서 생긴다.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무모함이 아니라, 가장 실체적인 정보 수집 활동이었다.


구직자는 일자리가 없다고 하고, 기업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업이 구직자를 찾아 거리를 나설 수는 없다. 반대로, 구직자가 구인 중인 회사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용기는 개인의 몫이지만, 다양한 경로를 안내하는 일은 사회의 몫이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위한 사회가 필요하다. 산을 오르고, 눈으로 담장을 넘겨다보고, 언젠가 한 번은 꼭 두드려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시간과 감각을 일깨우고 격려하는 사회 말이다.


문은 오늘도 열려 있다


우리는 언제쯤 이 지독한 탈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 다시, 5억 원짜리 안전한 스펙이 아니라, 거친 흙길을 밟으며 닫힌 문을 힘차게 두드리는 탐구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문은 오늘도 열려 있다. 십수 년 전 한 청년이 아무런 기약도 없이 빈손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던 것처럼. 닫혀 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쌓아 올린 두려움이라는 마음의 벽일 뿐이다.


언젠가, 아니 어쩌면 오늘,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그 일을 하는 회사는 어디에 있는가. 그곳은 어떤 곳인가.


조사하고, 관찰하고, 탐험하라.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 이제 교실 밖에서 실습할 차례다. 우리는 정답이라는 레일 밖으로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한 걸음은 무모함이 아니다. 문을 두드리는 그 순간, 진짜 ‘사회탐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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