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여진 판을 읽는 문해력

국영수 가르칠 때 사회학도 가르쳤어야

by 우드코디BJ

불안의 정체


2030 세대가 요즘 가장 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어쩌면 '불안'일지 모른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 속 뉴스를 넘길 때마다 같은 질문이 되풀이된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확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청년은 많지 않아 보인다. 월급은 오랜 시간 제자리인데 물가와 집값은 몇 걸음씩 앞서 달려간다. 목돈을 모을 만큼의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회사에서 성과를 내도, 이직을 해도, 자격증을 따도 삶의 진척은 체감되지 않는다. 마치 계단을 올라가려고 애쓰는데 계단 자체가 계속 위로 미끄러져 올라가는 느낌.


그래서 누군가는 주식 계좌를 열고, 누군가는 코인 차트를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해외 ETF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운 좋게 얻은 수익도 오래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투자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다'는 압박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과거처럼 "열심히 일하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설득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 노력만으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에 '투자'는 어느새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감각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와중에 어른들의 말은 늘 제각각이다. 어떤 전문가는 "지금은 위험하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전문가는 "기회는 늘 위기 속에 있다"라고 말한다. 언론은 하루 걸러 '폭락'과 '반등'을 오간다. 사회는 청년들에게 신중함을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빨리, 더 민첩하게 판단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면 안 된다"는 말과 "안 하면 뒤처진다"는 말 사이에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탓하며 헤매게 된다.


하지만 이 초조함은 청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그 어떤 사회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은, '현대 경제의 숨은 설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들을 밀어붙이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어린 시절부터 "네가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좋은 학교, 좋은 성적, 좋은 직장이 안정된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 공식은 오랫동안 작동했고, 기성세대는 실제로 그 길 위에서 삶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2030이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온 순간 그 공식은 이미 효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노동의 가치가 줄어들고, 자산 가격이 노동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오르기 시작했으며, 금리는 오르내리고, 물가는 멀리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을 잠식했다.


지금의 경제 환경은 청년이 어릴 적에 배웠던 세계와 전혀 다르다. 물가가 오르면 임금도 같이 오르던 시대가 아니다. 적금을 들면 이자가 붙고, 집값이 적당한 속도로 오르던 시대도 아니다. 한 세대 전에는 대졸 초임으로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월급의 수십 배 정도가 필요했다.


2024년 지금, 대졸 초임이 월 300만 원 안팎일 때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10억 원 수준에 이르렀다. 연봉으로 치면 수십 배, 월급 기준으로는 수백 배에 가까운 격차다.


게다가 청년들은 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경제 환경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금리가 왜 오르내리는지, 인플레이션이 왜 생기는지, 부채가 어떻게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는지, 이 모든 것은 시험 범위 바깥의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국영수였고, 사회에서 겪는 것은 금리·환율·부채·자산이었다. 이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청년 스스로 메꿔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는데, 그 시대를 살아갈 준비는 아무도 시켜주지 않은 것이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청년이 약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체제가 젊은 세대에게 가장 가혹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l0f071l0f071l0f0.png 불확실성 속에 갇힌 청년들


사라진 금융 브레이크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돈’은 너무 익숙해서 그 출발점을 떠올려볼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나 돈의 기원을 살피면, 지금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이 결코 개인의 문제나 세대의 특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 구조의 결과다.


금은 지구가 만들어낸 금속이 아니다. 초신성 폭발과 중성자별의 충돌에서 생성되어 우주 공간을 떠돌다 지구에 남겨진 물질이다. 인류는 이 금속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담긴 ‘희소성’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부식되지 않고, 형태가 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원하는 만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 금에 대한 특별한 신뢰를 만들었다.


이 희소함과 불변성은 금이 오랫동안 가치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시 사람들이 믿은 것은 단순했다. 쉽게 늘어나지 않는 것만이 오래 가치를 지킨다는 믿음이다. 금은 그 신념을 가장 안정적으로 구현한 물질이었다.


그래서 금이 돈의 기준이 되었던 시절의 경제는 태생적으로 제한을 안고 있었다. 새로운 금을 찾아내는 것 외에는 통화량을 늘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정책 판단이나 정치적 의지로 갑자기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이 제한은 경제에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인간의 욕망이 아무리 크게 출렁여도, 금이라는 물리적 기반이 전체 질서가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두었다.


금이 가치의 중심에 서자, 인류는 이 질서를 제도화했다. 바로 금본위제다. 금본위제는 통화의 가치를 금에 본위로 두는 체계로, 각국 정부는 자국 통화가 일정한 양의 금으로 언제든 교환될 수 있다는 약속을 했다.


이 약속은 국가 신뢰의 핵심이었다. 통화는 임의로 발행된 종이가 아니라, 금이라는 실물 자산에 의해 뒷받침되는 증표였다. 이 공통의 신뢰 위에서 국가 간 거래와 개인의 경제 활동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금본위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통화량에 명확한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점이다. 금이 늘어나지 않는 한 돈도 마음대로 늘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느리고 단단하게 움직였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더라도, 금이 없으면 돈을 만들 수 없었다. 정부가 국가를 빠르게 키우고 싶어도, 경기 침체를 단숨에 끌어올리고 싶어도, 금고 안의 금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정책을 크게 흔들 수는 없었다.


이 불편함 덕분에 경제는 급격하게 팽창하거나 기습적으로 붕괴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브레이크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다소 답답하고 느린 구조였지만, 그만큼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질서였다. 자산 가격이 오른다면, 그것은 실제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이어야 했다.


지금처럼 돈이 넘쳐흐르며 부동산과 주식, 각종 금융 상품이 실물 경제의 성장 속도를 훨씬 앞질러 뛰어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금본위제는 오랫동안 세계경제의 안전장치로 기능했다. 돈의 양이 제한된 만큼, 경제의 속도에도 자연스러운 한계가 존재했다. 이는 많은 사람에게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견고한 체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 규모는 폭발적으로 커졌고, 새로운 기술과 시장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전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철도와 항만, 대규모 산업 기반 시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자본을 요구했다.


문제는 금의 양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계가 확장하려는 속도와 금이라는 물리적 기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졌다.


이 지점에서 세계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성장을 멈추고 제한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오래된 제약을 넘어설 새로운 방식을 찾을 것인가. 결국 인류는 금본위제라는 브레이크를 서서히 풀기 시작한다.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멀리 가기 위해서였다.


그 선택의 결과, 세계는 ‘빚을 통해 돈을 조달하는 체계’로 이동하게 된다.


이 전환을 가능하게 한 핵심 도구가 국채였다. 국채는 정부가 발행하는 부채 증서로, 금을 보유하지 않아도 미래에 이자를 붙여 갚겠다는 약속만으로 지금 필요한 자금을 끌어올 수 있게 했다. 은행과 자본가들은 이 약속을 사고, 정부는 그 자금으로 전쟁을 치르고 철도를 놓고 산업을 확장했다.


금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우회해, 미래의 생산력과 국가의 신뢰를 담보로 현재의 자본을 사용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순간부터 돈의 성격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돈은 더 이상 ‘금으로 교환 가능한 증표’가 아니라, ‘국가가 상환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부채의 단위’가 된다. 국채의 등장은 단순한 재정기술이 아니라, 돈의 본질을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이 변화는 경제를 완전히 다른 속도로 움직이게 했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은행이 이를 사고, 금융기관들이 다시 거래하며 자본시장의 흐름이 형성됐다. 통화는 더 이상 금의 양에 묶여 있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확장될 수 있는 체계가 되었다.


그 결과 인류는 전례 없는 성장을 경험했다. 도로와 철도, 전기와 통신 같은 사회적 기반이 빠르게 구축됐고, 전쟁 이후 경제는 대규모 회복과 확장을 이뤄냈다. 국채와 부채를 기반으로 한 이 체계는 세계를 더 크고, 더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엔진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부작용이 숨어 있었다. 돈이 금의 양에 묶여 있지 않게 되자 화폐 공급량은 점점 더 크게, 더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돈의 양이 늘어난다는 것은, 돈 한 장이 가진 힘이 그만큼 약해진다는 뜻이다.


피자 한 판을 떠올려보자. 나눠 먹는 사람이 둘에서 넷으로 늘어나면, 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몫은 얇아진다. 돈도 마찬가지다. 사회에 존재하는 물건과 서비스의 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사려는 돈만 급격히 늘어나면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양은 줄어든다.


그래서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우리는 이를 물가 상승, 즉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이 과정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물가를 끌어올렸고, 자산 가격 역시 함께 밀어 올렸다.


그 결과 누군가는 자산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누군가는 월급만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격차 속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격차는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돈은 늘어났지만, 그 돈은 모두에게 동시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바뀐 통화 패러다임


1971년 8월 15일, 세계경제의 지도를 뒤흔든 역사적 선언이 발표된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다. 그날을 기점으로 세계는 더 이상 금을 기준으로 돈을 관리하지 않게 되었다. 금본위제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그전까지 달러는 언제든지 정해진 양의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약속된 돈'이었다. 그러나 닉슨의 선언 이후 달러는 금과의 연결을 끊고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신뢰"에 의존하는 돈, 즉 법정통화(Fiat Money)가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라 돈의 정의 자체가 완전히 바뀐 순간이었다.


금이라는 브레이크가 사라지자 돈의 양을 결정하는 기준은 더 이상 물리적 한계가 아니라 정책의 필요와 정부의 판단이 되었다. 그 결과, 통화 공급은 금본위제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세계는 부채를 통해 성장을 가속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국가가 빚을 내고, 가계가 빚을 내고, 기업이 빚을 내어 확장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돈은 '희소한 금속'이 아니라 정책의 결과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흘러 다니는 흐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세 가지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우선 통화량이 늘어나자, 그 돈은 먼저 부동산과 주식, 채권 같은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었다. 그 결과 자산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빠르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제 물가는 생산성이 늘어난 만큼이 아니라, 통화가 얼마나 풀렸는지에 따라 반응했다. 경제 성장보다 중앙은행의 결정이 더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변화는 돈이 흐르는 순서였다. 유동성은 금융의 중심부에서 시작해 자산시장을 거쳐 서서히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먼저 돈을 만난 집단은 가격 상승의 수혜를 누렸고, 청년은 대부분 이미 가격이 움직인 뒤에야 시장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는 금본위제의 브레이크를 떼어낸 이후 세계가 선택한 하나의 방향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부채와 자산이 끊임없이 팽창하는 세계로 이어졌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 체제의 가장 뒤쪽에서 시장에 들어온 세대다.


월급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반면, 집값과 자산은 수십 년간 누적된 통화 팽창의 결과로 이미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2030세대의 질문은 더 이상 ‘열심히 일하면 올라갈 수 있는가’가 아니다. 이 판에서 자신이 언제쯤 출발선에 설 수 있는가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으로 옮겨간다.


닉슨 쇼크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청년들이 매일 마주하는 집값, 월급, 대출이자, 주식시장, 불안의 원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돈은 도착하는 순서가 있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등장한다. 돈은 한꺼번에 퍼지지 않는다. 순서대로 내려온다. 이 순서를 설명하는 개념이 ‘켄틸런 효과’다.


18세기 경제학자 리처드 켄틸런은 화폐가 새로 공급될 때, 그것이 사회 전체에 동시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도착하는 곳과 나중에 도착하는 곳이 갈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현대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면 그 돈은 가장 먼저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장부에 찍힌다. 정책 변화의 신호를 가장 빨리 읽고, 가장 싼 비용으로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집단이 먼저 움직인다. 이 시점에서 자산시장이 반응한다. 부동산, 주식, 채권 가격이 먼저 흔들리고, 먼저 오른다.


그다음에야 언론과 지표가 이를 설명하고, 유튜브와 SNS가 불을 붙인다. 일반 개인이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에는 이미 가격이 한 차례 움직인 뒤다. 이 순서의 차이가 곧 격차가 된다.


먼저 돈을 만난 쪽은 가격 상승의 수혜를 누리고, 늦게 들어온 쪽은 이미 비싸진 세상을 정가로 떠받치게 된다. 이것이 켄틸런 효과의 핵심이다.


결국 문제는 돈의 ‘양’이 아니라 ‘도착 순서’다. 이 순서가 바뀌지 않는 한, 격차는 반복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작동법


주식시장에는 오래전부터 회자되던 격언이 있다. 이른바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말이다. 과열도 욕심도 피하고, 바닥과 꼭대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으로 오랫동안 개인의 심리를 다잡는 기준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에서 이 격언은 종종 공허하게 들린다. 무릎과 어깨는 ‘가격의 구간’이기 전에, 진입 시점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무릎이 보이는 자리에서 시작할 시간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미 허리까지 올라온 뒤에야 ‘기회’라는 말이 들린다.


청년 투자자가 차트를 켜는 순간은 대개 그 지점이다. 뉴스는 여전히 높은 수익률을 말하고, 증권가는 지금이라도 올라타야 한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그 무렵이면 먼저 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미 조용히 출구를 준비하고 있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은 이를 기회로 인식하지만, 앞서 들어온 사람들은 그 열기를 이용해 빠져나간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스스로를 돌아본다.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 어디서 선택이 어긋났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이 결과를 개인의 실수로만 설명하기에는,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무릎’이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닿을 수 없는 ‘천장’만 보이도록 짜인 설계가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무지 탓이 아니다. 돈이 흐르는 경로 자체가 처음부터 비탈지게 설계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켄틸런 효과는 단순한 경제 용어가 아니다. 부의 사다리가 어떻게 걷어차이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냉정한 메커니즘이다.


돈이 흔해지면 나타나는 현상


켄틸런 효과는 자산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순서는 우리의 일상물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돈은 먼저 자산시장에 도착해 가격을 밀어 올리고, 그다음 생활물가로 번지며, 임금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움직인다. 이 시간차가 인플레이션을 청년에게 더 가혹하게 만든다.


인플레이션은 흔히 ‘물가 상승’으로만 이해된다. 장바구니가 비싸지고, 전세가 오르고, 점심값이 만 원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체감된다. 하지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금에 가깝다. 세율을 올리지 않아도 돈의 가치가 줄어들어 실질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먼저 도착한 돈은 자산 가격을 올린다. 부동산과 주식 같은 자산이 먼저 반응한다. 늦게 도착한 돈은 이미 오른 가격을 떠받치는 데 쓰인다. 청년이 시장에 진입할 때는 ‘시작점’이 아니라 ‘이미 올라간 가격’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임금이다. 생활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생활비는 빠르게 오르고, 저축의 실질 가치는 줄어든다. 같은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삶의 면적이 해마다 얇아진다. 그래서 청년의 노동소득은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한 채 기반이 조금씩 깎여 나간다.


이 구조에서 가장 마지막에 돈을 받는 집단이 가장 큰 부담을 지도록 짜여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세금처럼 계좌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니 눈에 띄지 않고, 그래서 저항하기도 어렵다. 대신 삶의 바닥을 조용히 갉아먹는다.


금리는 오르고, 자산은 이미 높아져 있고, 월급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일 뿐이다. 이 압박 속에서 2030 세대는 투자와 투기 사이의 흐릿한 경계로 밀려난다. 부모 세대의 “절약하면 된다”는 조언은 틀린 말이 아니라, 작동하던 시대가 달라졌다는 뜻에 가깝다.


지금 청년이 느끼는 피로감은 단순한 ‘돈 모으기의 어려움’이 아니다. 처음부터 불리한 판에 들어가 매 라운드마다 가치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구조적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인플레이션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청년에게 가장 높은 부담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부채로 굴러가기 시작한 세계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세계경제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랐다. 금에 묶여 있던 통화는 자유로워졌고, 정부는 필요에 따라 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으며, 중앙은행은 금리라는 강력한 도구로 경제의 속도와 온도를 조절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히 통화량이 늘었다는 사실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순간부터 세계경제는 부채를 통해 성장하고, 그 부채가 위기를 만들고, 그 위기를 다시 더 큰 부채로 덮는 하나의 순환 구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법정통화 시대에 부채는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사회 인프라를 확장하고, 기업은 대출로 공장을 짓고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가계는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대출을 선택한다. 부채는 오늘의 적은 자본을 미래의 더 큰 생산력으로 바꾸는 도구가 되었고, 실제로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경제의 성장은 저축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난 부채에 의해 밀어붙여졌다.


문제는 이 연료가 한 번 사용되기 시작하면 계속 더 필요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부채는 성장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산 가격을 밀어 올리고,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이 결합되면 시장은 쉽게 과열된다. 이때 금리가 오르거나 경제가 둔화되면 그 부채는 순식간에 취약한 고리가 되고 만다.


기업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흔들리고, 가계는 대출 상환 부담에 눌리고, 정부는 기존 부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부채를 끌어와야 한다. 성장을 위해 사용한 부채가 위기를 만들고, 그 위기를 다시 더 큰 부채로 해결하는 구조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반복되어 온 것이다.


요컨대, 금이라는 브레이크가 사라진 이후 세계는 성장을 멈추는 대신 부채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더 빠른 확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불균형이 누적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세 번의 위기, 똑같은 처방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왔을 때, 각국 정부는 IMF의 구제금융과 대규모 유동성 공급으로 대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금리를 제로에 가깝게 내리고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수조 달러를 시장에 쏟아부었다.


2020년 팬데믹이 세계를 멈췄을 때, 각국은 또다시 유례없는 규모의 재정 지출과 통화 공급으로 경기를 떠받쳤다. 세 번의 위기, 세 번의 대응. 그리고 세 번 모두 같은 방식이었다. 돈을 더 푸는 것.


한국의 경우 더 극단적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IMF는 구조조정과 함께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 돈은 부동산과 주식으로 먼저 흘러갔고, 자산 가격은 급등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가계부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집을 사려면 빚을 내야 하고, 빚을 갚으려면 더 일해야 하고, 더 일해도 자산 가격은 더 빨리 올랐다.


2020년 팬데믹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동성은 부동산 시장으로 쏠렸고, 청년들은 '영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었다. 시장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위기는 한층 완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이 방식은 치료가 아니라 강력한 진통제에 가까웠다.


왜 그럼에도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가. 지금의 세계를 지탱할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경기가 둔화하고 실업률이 오르면 정부는 지지율과 선거를 걱정하고, 중앙은행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 기업은 매출을 유지해야 하고, 가계는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이때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은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한 '즉시 효과'를 제공한다. 돈이 시장으로 흘러들면 심리는 진정되고, 자산 가격은 반등하며, 경제는 다시 살아난다.


문제는 그 부작용이 언제나 다음 위기의 씨앗이 된다는 점이다. 이 순환의 구조는 늘 비슷한 흐름을 가진다. 부채가 늘고, 자산 가격이 오르고, 시장은 과열된다. 금리가 오르면 부채 부담이 커지고, 부담을 견디지 못하는 지점에서 위기가 터진다.


위기를 막기 위해 금리는 다시 내려가고 더 큰 부채가 공급된다. 그러면 자산 가격은 이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불안 요소는 그만큼 더 크게 축적된다. 그리고 새로 공급된 유동성은 항상 자산시장으로 먼저 흘러들어 갔다.


자산 가격은 높아졌고, 자산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해마다 더 크게 벌어졌다. 이 구조 속에서 뒤늦게 들어오는 세대일수록 더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기성세대가 사회에 진입하던 시기에는 물가가 낮았고, 금리는 높아 저축만으로도 자산을 늘릴 수 있었으며, 집값도 지금처럼 높은 장벽이 아니었다. 하지만 2030 세대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들어섰을 때 세계는 이미 수십 년 동안 누적된 부채 팽창의 끝자락에 있었다.


집값은 이미 높았고, 금융시장은 과열과 조정을 반복했으며, 물가와 이자율은 끊임없이 변하며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2030 세대가 느끼는 불안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반응이다. 왜 집값은 이렇게 비싸졌는지, 왜 대출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지가 이 불안의 출발점이 되었다.


금본위제라는 브레이크가 사라진 순간부터 세계는 더 빠른 성장과 더 큰 확장을 선택했고, 그 대가로 부채를 감내해야 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제 세계는 부채 없이는 성장할 수 없고, 부채가 쌓이면 위기가 오고, 그 위기를 다시 부채로 덮어야 하는 스스로 만든 순환 고리 안에서 움직인다.


이 순환의 충격은 뒤늦게 판에 들어온 세대에게 더 크게 와닿는다. 청년에게서 불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기는 매번 달랐지만, 대응은 늘 같았다. 붕괴를 막기 위해 돈을 더 풀었고, 그 선택은 다음 위기의 씨앗이 되었다.


사회라는 판을 읽는 문해력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은 예민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경제의 틀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압축하면 이렇다. 금의 희소함에 기대어 움직이던 경제는 금본위제를 거쳐 부채 기반의 법정통화 체제로 이동했다. 돈은 더 이상 금고 속의 금이 아니라, 정부의 약속과 중앙은행의 결정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돈은 언제나 금융의 중심부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해 자산 가격을 밀어 올린다.


물가는 점차 오르지만 임금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세계는 위기를 부채로 덮는 방식을 반복해 왔고, 그 흐름이 수십 년 누적된 끝자락에서 시장에 들어온 세대가 바로 지금의 청년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도 제자리에 머무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거대한 설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 세계는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했는데 누군가는 멀리 가 있고, 누군가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유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투자와 투기, 기회와 위험의 경계 역시 흐릿해진다.


그러나 판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풍경이 달라진다. 자산 가격이 왜 오르는지, 금리가 왜 중요한지, 유동성이 왜 청년의 삶을 직접 흔드는지, 인플레이션이 왜 보이지 않는 세금처럼 작동하는지가 하나의 구조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제야 시장에서 반복되던 조언들도 다르게 들린다. 저점과 기회,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말들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통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끝내 통하지 않는지도 분명해진다. 판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투자와 투기는 비슷해 보이지만, 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그 둘은 전혀 다른 선택이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로 바뀐다. 설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장을 맞히겠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구조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이 태도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공포에 압도되지 않으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인식한 채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관점 전환이 필요해진다.


개별 시장은 나무이고, 사회는 숲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무를 본다. 가격과 차트, 수익률을 묻는다. 그러나 나무의 조건은 대개 숲에서 먼저 만들어진다. 금리와 부채, 기술과 고용의 구조가 바뀌면 나무가 받는 빛과 물, 바람의 조건부터 달라진다.


그래서 먼저 봐야 할 것은 어느 나무인가가 아니라, 이 숲에 어떤 변화가 쌓이고 있는지다. 변화는 늘 같은 속도로 오지 않는다. 계절처럼 천천히 누적되는 변화도 있고, 병충해나 화재처럼 한순간에 숲의 질서를 바꾸는 충격도 있다.


이 숲이 지금 어떤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그 흐름을 읽는 시야가 이 글에서 말하는 ‘사회 문해력’이다. 이는 단지 차트를 읽는 눈이 아니다. 금리가 고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기술 변화가 직업 지도를 어떻게 바꾸는지, 사회적 필요가 어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지를 함께 읽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이 문해력을 가진 사람은 시장만 바라보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방향 속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가늠한다. 그래서 이 문해력은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산업이 확장되고 있는지, 어떤 역량이 점점 필요해지는지, 어떤 일이 사라지고 어떤 일이 새로 생겨나는지까지, 진로와 생계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


정답은 가르쳤지만, 판은 배우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제의 메커니즘은 개인의 성향이나 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흐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중요한 설계를 학교에서 거의 배우지 못했다.


국영수 중심의 교육은 빠르고 정확하게 정답을 찾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는 정답보다 구조를 읽어야 하는 세계였다.


금본위제가 왜 무너졌는지, 법정통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부채 기반의 경제가 왜 반복적으로 위기를 만드는지,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부를 이동시키는지, 돈이 먼저 도착하는 순서가 왜 불평등을 만드는지. 이 모든 것은 시험 범위 밖에 있었다.


학교는 우리에게 '정확한 답을 찾는 법'은 가르쳤지만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를 묻는 감각은 주지 않았다.


주어진 문제를 빠르게 푸는 능력은 익혔지만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구조로 이해하는 법은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청년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마주한 현실은 학교에서 배운 세계와 너무나 달랐다. 금리는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드는 변수였고, 부채는 선택이 아니라 시작점이 되었으며, 인플레이션은 조용히 저축의 가치를 갉아먹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변화의 의미를 누구도 미리 설명해주지 않았다. 교육이 이런 공백을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한국 교육제도는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물가가 안정적이며, 정규직 고용이 넓게 열려 있던 시대의 전제 위에 설계된 제도였다.


그 시대에는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 곧 사회적 성공과 직결되었다. 시험 성적이 진로를 결정했고, 좋은 대학은 안정된 직장으로 가는 입구였다. 노력과 성실이 미래를 보장해 주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에게 주어진 세계는 당시의 전제와 완전히 다르다. 성장은 느려졌고, 물가는 끊임없이 오르고, 평생직장은 희귀해졌으며, 한 번의 실패가 돌이키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교육은 여전히 옛 질서의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정답과 속도, 암기와 처리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위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는 먼 학문이 되어선 안 된다. 집세와 식비, 월급과 대출, 금리와 물가. 일상의 거의 모든 요소는 정치적 판단과 경제 구조의 결과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교과는 삶의 언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채가 어떻게 자산을 움직이는지, 인플레이션이 왜 ‘보이지 않는 세금’인지, 유동성이 왜 세대 간 격차를 더 크게 만드는지 같은 삶과 직결된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들은 사회로 나오자마자 마치 번역되지 않은 언어와 마주한 듯한 막막함을 느낀다. 이 세계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 왜 자신은 늘 한 발 늦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어디서부터 이해를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교육이 중요한 설계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청년에게 오류가 난 지도를 건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답을 찾는 법만 가르쳐놓고,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내보냈다.


지도는 예측 가능한 길을 그려놓았지만, 청년이 마주한 세계는 끝없이 예측 불가능했다. 이 공백은 청년에게 불안을 남겼다. 그러나 그 불안은 청년의 잘못이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다.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읽어내는 문해력이다.


우리는 국영수로 정답을 푸는 법은 배웠지만, 정작 이 세계가 어떤 설계 위에서 굴러가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청년의 불안은 반복되고,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오해된다.


중요한 질문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다. 설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장을 맞히겠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구조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자산 투자도 좋다.

그러나 가장 먼저 투자할 곳은 자신이다.

이 사회를 읽어내는 문해력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너는 가장 단단한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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