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대기실에 놓일 삼나무 가구를 만들며
지난여름, 유난히 공기가 가라앉아 있던 날이었다. 밖에 나서도 더위가 확 밀려오지 않고, 대신 공기가 천천히 몸에 달라붙는 오후였다.
지인의 소개로 치과 원장 한 분이 회사로 찾아왔다. 진료실이나 대기 공간에 두었을 때, 환자들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재작년 치과 치료를 받았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진료 의자에 앉아 있는 내내, 치과 기구가 내는 날카로운 소리와 입안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두 손을 꽉 쥐곤 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고, 팔걸이를 움켜쥔 손가락 끝이 저리도록 하얗게 변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종류의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어떤 형태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고, 나무에 대해서도 막연한 호감만 있을 뿐이었다. 다만 직접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이 먼저였다.
함께 공간을 돌며 전시된 목재 작업물을 하나씩 살폈다. 말수가 많지 않던 원장님은 캐나다 작가 브렌트 콤버의 작품 앞에서 잠시 멈췄다. 한 조각을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이건 어떤 나무냐고.
북미 지역에서 많이 산출되는 웨스턴 시더 수종이라고 답하자,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이 나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순간, 제재부에서 웨스턴 시더를 켤 때 나던 특유의 향과 판재의 결을 떠올렸다.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굳이 이 자리에서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저 잠자코 있었다.
공간에 무리 없이 스며드는 나무
아쉽게도 당장 작업에 투입할 수 있는 웨스턴 시더 원목은 우리에게 없었다. 한때 건물 외벽 사이딩재로 자주 쓰였지만, 유행이 바뀌고 질 좋은 웨스턴 시더 수급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들여오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대신 야적장 한쪽에 같은 삼나무과에 속하는 저패니즈 시더(Japanese Cedar) 원목이 남아 있었다. 결이나 색이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삼나무류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패니즈 시더로 만든 샘플을 보여드렸다.
혹시나 저패니즈 시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생각하던 차에 굳어있던 원장님 표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아까 원목 야적장에서 느꼈던 작은 불안이 비로소 가라앉았다. 십수 년간 목재를 다루며 가장 보고 싶은 표정이기도 하다.
같은 수종으로 똑같은 목제품을 만들어도 색감과 결 문양이 전부 다르다. 이리저리 물결치는 천연대리석의 문양처럼 나무가 갖는 물성도 본디 그렇다. 어떤 고객은 좋아하지만, 어떤 고객은 아쉬워한다. 그 차이를 메울 방법은 없다. 다만 나무가 가진 고유의 특질이 고객의 마음에 닿기를 바랄 뿐이다.
삼나무를 고른 고객들의 한줄평은 대개 이렇다. 향은 은근하고, 표면은 부드럽지만 과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만드는 입장에서도 아주 단단한 수종은 아니라 생산이 까다롭지 않고, 비바람에 강해 외장재로도 많이 쓰이는 나무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장님은 원목 하나로 몇 개의 오브제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문할 품목과 규격, 수량이 대략 윤곽이 그려졌기에, 무엇보다 우선 원목을 정확히 검척해야 했다. 길이와 지름을 재고, 그 안에서 가능한 주문품 범위를 가늠해 보자는 쪽으로 대화가 흘렀다.
결국 이번 주문건은 치과라는 공간에 놓일, ‘긴장이 느슨해지는’ 가구와 오브제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무를 버리지 않고 쓰는 법
다음 날, 야적장에 쌓여 있던 세 그루의 삼나무를 지게차로 옮겨 가지런히 늘어놨다. 길이는 4미터 남짓, 지름은 대략 평균 잡아 600밀리미터에서 650밀리미터 정도였다.
원목의 뿌리 쪽 횡단면을 원구, 반대쪽을 말구라고 부른다. 보통 원구 지름이 말구보다 굵은 편이다. 머릿속으로 수령이 지긋이 자란 커다란 나무를 그려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세 그루 중 하나는 벌목된 나무의 기다란 몸통 중간 즈음에서 나온 원목인지 원구와 말구의 차이가 적었다. 큰 각재로 켜내기 좋은 형태였다.
제재를 앞두고 규격 치수를 고민했다. 둥근 원목을 어느 정도 크기로 켜내야 수율이 좋을지 확신이 필요했다. 30밀리미터, 350밀리미터, 400밀리미터 크기의 MDF틀을 만들어 번갈아 대보고 분필로 선을 그었다.
원목의 가장 홀쭉한 부분을 기준으로 삼아야 최대한 큰 규격의 각재를 얻을 수 있다.
원구에서 말구까지 톱날을 쭉 켰을 때 온전히 남길 수 있는 최대치는 400밀리미터였다. 그렇게 400밀리미터 정사각형으로 제재하고, 길이는 1000밀리미터로 맞추기로 했다. 원목 하나를 켜서 네 개의 덩어리가 나왔다.
원목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켜지 않았다. 일부는 큰 각재로 켰고, 일부는 판재로 제재했다. 오브제뿐 아니라 대기실에 놓일 가구도 함께 주문받았기 때문이다. 가구는 짜맞춤 기법으로 만들기로 했다.
제재 작업을 마치고 필요한 규격의 목재를 확보했다. 계산이 맞아떨어졌다는 성취감보다 나무를 알차게 썼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지금도 남겨진 나무토막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쓸모를 찾지 못하면 썩으면서 품고 있던 탄소를 다시 대기로 돌려보낼 테니까.
길고 큰 각재는 곧 대차 제재기에 다시 올려져 1000밀리미터 단위로 길이를 잘랐다. 원목의 둥근 형태가 사라지고, 표면에 직선이 생기면서 제작할 목물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제 원목은 재료가 아니라, 곧 쓰임을 앞둔 물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비를 맞은 나무의 시간
작업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공기가 눅눅해 나무에는 수분이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바로 다음 공정으로 넘기기보다는 잠시 숨을 고르게 두는 편이 나았다. 햇볕이 들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목재를 옮겨 두고, 건조되는 기색을 천천히 살폈다.
억수같이 소나기가 쏟아져 목재가 흠뻑 젖는 날도 있었다. 말리려고 야적장에 널어 둔 삼나무 위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면, 습기를 잃어가던 표면은 순식간에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사람 눈에는 그저 나무가 젖는 풍경일 뿐이지만, 그 순간 목재 안팎에서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서서히 쌓이기 시작한다.
겉은 빗물을 머금어 미세하게 부풀고, 속은 여전히 마르는 중이다. 늘어나려는 겉과 버티는 속 사이에서 응력이 생기고, 그 미묘한 힘의 균형이 목재의 품질을 좌우한다. 빠른 건조에 끌려가던 표면이 비에 젖으며 잠시 힘을 풀었다 다시 조여들고, 그 반복이 갈라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려 준다.
제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목재 널은 비가 와도 매번 서둘러 치우지는 않는다. 표면이 지나치게 빨리 마르며 생길 수 있는 할렬 걱정이 조금은 덜어지기 때문이다. 빗물이 표면에 얇은 수막을 만들어 속과 겉의 건조 속도를 어느 정도 맞춰 주면서, 내부 수분이 비교적 균일하게 이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갈라짐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경우도 있고, 건조 품질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편이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나면 표면은 다시 빠르게 마른다. 젖고 마르기를 거듭하면서 나무는 팽창과 수축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강한 햇볕이나 과도한 바람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목재를 옮기고 가려 주려 애쓴다.
나무를 다루는 일은 톱과 끌을 쓰는 시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숙성과 건조의 시간이 길다. 기다림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결국 결과를 가른다.
큰 각재를 가공부로 옮겨 샌딩 하며 다듬고, 판재는 재단하고 장부를 내고 맞추며 가구를 만들었다. 이번 작업은 마감 도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목공에 관심이 많은 원장님이 마감은 직접 해보고 싶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당부는 잊지 않았다. 건조한 실내로 들어간 나무는 수분을 뱉어내며 갈라지기 쉽다. 그렇기에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도장 작업을 마쳐달라고 부탁드렸다. 꼼꼼한 마감은 나무의 급격한 호흡을 조절해 변형을 막아주는 옷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을 원하지만, 자연스럽지는 못한 마음
몇 달이 지나 원장님이 다시 찾아왔다. 완성된 오브제와 가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생각보다 더 좋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제야 작업 내내 남아 있던 긴장이 풀렸다.
이렇게 주문품을 완성해서 고객에게 내보일 때면 늘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보고 만든 이 덩어리가, 그 사람이 마음속에 그려두었던 장면과 너무 멀리 가 있지는 않았을지.
요즘은 유난히 자연재료에 마음이 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자연주의 삶을 표방하는 '킨포크 스타일'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균질하고 완벽한 것들에 둘러싸인 채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삶 때문이 아닐까. 잠시라도 느슨해질 수 있는 감각을 찾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나무 앞에 서면 갈라짐을 흠으로 본다. 자연을 원하면서도, 자연이 가진 불완전함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화학섬유와 달리 순면이나 울 제품은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면 셔츠의 구김이나 울 스웨터의 수축을 결점이라 부르지 않는다. 다만 나무에 대해서만, 그 사실을 때때로 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변화가 스스로 지나온 시간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 삼나무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표정이 달라질 것이다. 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고, 그곳의 온습도 변화와 함께 조금 늘어나고, 또 조금 줄어들기를 반복하면서, 말없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제 몫을 할 것이다.
치과 치료 순서를 기다리며 두 손을 꽉 쥔 누군가의 손바닥이, 이 나무와 함께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느슨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세 그루의 삼나무들은 존재의 이유를 찾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