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드에서 혼설족까지, 세대가 바꿔온 명절의 풍경
설 명절 전 주말, 가까운 지인들과 종묘를 방문했다.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이 공간은 국가가 제례를 통해 정통성을 확인하던 곳이다. 안내문구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토록 공들여 조상을 모시던 문화가, 지금 우리 명절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오래된 속담이다. 남의 집 일에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명절 풍경을 보면 이 속담을 고쳐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끼리 서로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
이게 더 현실에 맞는 말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차례를 안 지내는 사람이 늘었다
올해 설을 앞두고 농촌진흥청이 수도권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설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라고 답한 비율이 63.9%에 달했다. 전년보다 12.4% 포인트나 늘어난 수치다. 한국리서치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차례나 제사를 지내겠다"는 응답은 35%에 그쳤고, "차례와 제사가 필요하다"는 응답조차 44%로 절반에 못 미쳤다.
두 기관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물었는데 결과는 비슷한 모양새다. '실제로 하는가'도 줄었고,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절반 아래로 내려왔다.
세대 간 격차는 더 확연히 갈린다. 18~29세는 설의 의미를 '휴식과 재충전(52%)',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휴일(48%)'이라고 답한 비중이 다른 연령대보다 월등히 높았다. 30대 이하의 54%는 "따로 사는 친척을 만나지 않고 조용히 쉬겠다"라고 했고, 이 수치는 전 연령대 중 유일하게 과반을 넘겼다.
반면 60대 이상과 70세 이상은 '조상 및 돌아가신 가족·친지 추모'라고 답한 비율이 각각 38%, 37%였다. 18~29세(9%)와 30% 포인트 가까운 차이다.
이 정도면 같은 명절을 다른 민족이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례는 원래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우리가 '명절 차례'라고 부르는 의식이 원래부터 지금처럼 무거웠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차례(茶禮)는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이 돌아왔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의식으로, 본래 차(茶)를 올리던 습속에서 유래한 말이다. 간소한 것이 본모습이었다. 반면 기제사(忌祭祀)는 고인의 기일에 조상의 영혼을 모셔 와 음식을 대접하는 의례로, 상차림이 더 풍성한 쪽에 가깝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명절 차례상이 기제사처럼 커졌다. 왜 그렇게 됐을까.
역사학자 권내현은 저서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에서 한 노비 가계가 200년에 걸쳐 양반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했다. 그가 밝혀낸 것은, 법적 신분을 바꾸는 데는 돈이 필요했지만 사회적으로 '양반임'을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성씨와 본관을 만들고, 족보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는 것. 그 여정의 종착역에 제례가 있었다. 제사는 추모가 아니라 신분의 마침표였던 셈이다.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은 벼슬 품계에 따라 제사 대수를 달리 규정했다. 원래 모두가 고조부모까지 4대를 모신 게 아니었다. 신분제가 무너지자 너도나도 양반의 형식을 따랐고, 성균관유도회총본부는 이를 '차례의 제사화'라 부른다.
유학계에서는 갑오경장 이후 신흥 부유층의 모방과 과시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제례의 형식 상당 부분이 사실은 그 욕망의 유산인 셈이다.
흐뭇한 명절이 피곤한 명절이 된 과정
갑오경장 이후 형식이 과시로 변질되어 왔다면, 그다음 변화들은 신조어로 나타났다.
2000년대 후반, '시월드'라는 말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블로그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시댁을 하나의 세계(world)로 빗댄 이 신조어는 2009년 기사에서 이미 '신조어'로 언급될 만큼 빠르게 확산됐고, 2012년 드라마를 계기로 대중 언론에도 정착했다. 이 말을 만들고 퍼뜨린 층은 대략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출생의,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사이에 시댁 명절을 처음 겪은 세대였다고 읽힌다.
올해 실시된 명절 스트레스 요인 설문조사를 봐도 남성은 경제적 지출 부담(53.4%)을 압도적 1위로 꼽은 반면, 여성은 경제적 부담(32.3%)과 가사노동·음식 준비(29.5%)를 거의 같은 비중으로 지목했다. 같은 명절을 보내도 부담의 무게가 실리는 곳이 달랐다.
'시월드'가 "시댁 권력과 가사노동의 불균형"을 한 단어로 압축한 저항의 표현이었다면, 그다음 세대는 한 발 더 나아갔다. 2016년 전후로 온라인에서 퍼진 '명절 잔소리 메뉴판'이다. "모의고사 몇 등급 나오니", "취업은 아직도 못 했니", "연봉은 얼마니", "언제 결혼하니", "애는 언제 낳을 거니", "애는 공부 잘하니" 등의 질문에 가격표를 붙여버렸다. '관심'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이것이 사실은 참견이자 침해라는 것을 풍자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최근 세대는 아예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각자 명절'이다. 부부가 함께 양가를 오가는 대신, 남편은 시가로, 아내는 친정으로 따로 가거나, 아예 각자 부모를 모시고 여행을 떠나는 방식이다. 2023년 가족실태조사에서 "부부가 각자의 가족과 명절을 보내는 것에 동의한다"는 응답은 35.1%로, 2020년(29.9%) 보다 증가했다. 특히 20대는 49.1%가 동의했다.
최근 한국리서치의 설 모임 및 일정 계획 조사에서도 '따로 사는 가족을 만날 예정'이라는 미혼자의 응답은 56%에 그쳤고, 30대 이하에서 67%가 '친구나 지인을 만날 것'이라고 응답했다. 전통적인 가족 모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피로감을 피해 '자발적 혼설족(홀로 설을 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흐름이 보인다. '시월드'는 문제에 이름을 붙이는 단계였고, '잔소리 메뉴판'은 말의 폭력을 가시화하는 단계였으며, '각자 명절'과 '혼설'은 생활 방식 자체를 재설계하는 단계다. 이쯤 되면 자발적 이산가정이 늘어난 변천사가 아닌가.
직장에서는 폭언, 가정에서는 덕담
이쯤에서 나는 '가족 갑질'이라는 말을 꺼내고 싶다. 좀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직장 갑질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권력 불균형이 있고,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언행이 있으며, 그로 인해 심리적 상처가 생긴다. 가족 내에서 명절마다 반복되는 잔소리, 간섭, 비교, 강요의 구조가 이와 다른가. 본질은 같다.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권력적 언행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국가는 직장 갑질에 대해서는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경직된 조직문화'를 이유로 회사를 떠나는 청년들이 늘고 있고,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 '그냥 쉬었음' 인구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통계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국가가 나서도 이 정도로 풀기 어려운 것이 바로 '갑질'이다.
그런데 가족 갑질은 어떤가. '가족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된다. 폭행만 가정 폭력으로 인정받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폭언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한두 번의 걱정이 아니라, 위계를 등에 업고 선택을 통제하고 자존감을 깎는 반복적 언행이다. 심리적 가정 폭력이라는 개념이 법적·사회적으로 더 명확하게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다.
명절은 그 구조가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무대다. 일 년에 몇 번, 피할 수 없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에서 권력과 언어가 충돌한다.
직장에서 상사가 "우린 한 가족이야"라고 말하자, 누군가 "제 가족은 집에 있는데요"라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이걸 세대 차이가 만든 웃음거리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가족이니까'에서도 서로 간 시각 차이가 확 드러나는 때가 있다. 가족이라는 말이 무례의 면죄부가 되고, 참견을 정당화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지켜야 할 건 정성, 덜어낼 건 강요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우리 명절 문화에 필요한 것은 '온고지신'이 아니라 '개과천선'이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차례가 간소해지는 것이 전통의 파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것 상당 부분이 사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 해체와 과시 문화가 뒤엉키며 기형된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
본래 차(茶) 한 잔을 올리던 차례가 기제사 수준의 상차림으로 부풀어 오른 과정에는 추모의 마음보다 체면과 과시가 더 크게 작용했다.
줄이려는 것은 조상을 기억하는 마음이 아니다. 차례와 제사가 뒤섞이고, 신분 과시의 역사와 엮이며 커진 '형식의 부담'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의 부담에 더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로 대표되는 가해와 피해가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성적, 취업, 연봉, 결혼, 출산. 명절마다 반복되는 이 질문들이 덕담이라는 표현으로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에게 그것이 상처가 된다면 그건 더 이상 덕담이 아니다.
'시월드', '잔소리 메뉴판', '각자 명절', '혼설'로 이어지는 세대별 저항의 역사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상처의 언어들이다.
흐뭇한 명절이 피곤한 명절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는 충분히 쌓였다. 이쯤이면 우리 스스로 한 번은 멈춰 돌아봐야 할 때다. 가족끼리 서로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자. 차례는 정성으로 모시고, 덕담은 감사를 전할 때 명절이 비로소 즐거워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