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기피 시대, 기록과 축하로 바뀐 모임 문화
회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먼저 한숨부터 떠올린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무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지고, 누군가는 시계를 힐끔거리고, 누군가는 저녁 약속을 접어야 하나 계산한다. 한때 회식은 한국 직장인의 저녁을 가장 익숙하게 점유하던 풍경이었다. 고단한 하루 끝에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이기도 했고,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의 발목을 붙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장면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처럼 사람을 오래 붙잡아 두는 술자리는 힘을 잃고, 그 자리에 다른 방식의 만남이 들어서고 있다. 함께 늦게까지 남는 것보다, 함께 쌓아온 시간을 알아보는 모임. 이 글은 한국 직장인의 회식이 어디에서 시작됐고 어떤 얼굴로 번성했으며, 왜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더듬어 보려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술판 회식을 걷어낸 자리에 무엇이 싹트고 있는지도 함께 보려 한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회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 사회에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일이 어떤 뜻을 가져왔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식사는 단지 끼니를 때우는 일이 아니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이 안부이자 약속처럼 오가는 사회에서, 밥상은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회식도 결국 그 연장선 위에서 자라난 문화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향약과 두레, 품앗이 같은 오래된 공동체 문화가 보인다. 힘든 농사일을 마친 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새참을 나누고 막걸리 사발을 돌리던 풍경에는, 고된 노동의 피로를 덜고 서로의 수고를 확인하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오래전부터 공동체를 묶는 생활 방식이었다.
여기에 근현대의 결핍도 한몫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지나며 물자가 부족해졌고, 한 상에 여럿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풍경도 더 익숙해졌다. 제사 뒤 술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음복의 전통까지 겹치면서, 함께 먹는 일은 생계와 정서와 의례가 한데 얽힌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지금의 회식도 완전히 낯선 풍속이라기보다, 그런 오래된 생활 감각이 회사라는 공간 안으로 옮겨온 결과에 가깝다. 함께 밥을 먹는 일이 원래는 정을 나누고 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면, 직장에서는 그 자리에 소속과 질서의 의미까지 더해졌다. 사람을 잇는 밥상이 어느 순간 빠지기 어려운 관행이 되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회식 문화는 오래된 공동체의 정서와 근대 조직의 규율이 한자리에 겹쳐지며 자라난 셈이다.
산업화 시대, 퇴근 후의 밥상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국 사회는 오래 숨 돌릴 틈 없이 달려야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산업화는 나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처럼 움직이게 했다. 기업 문화는 군대식 질서를 닮았고, 상명하복과 장시간 노동은 거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함께 밥을 먹는 문화가 오래된 생활 감각에서 자라났다면, 이 시기부터는 그 밥상 위에 조직의 규율과 위계가 더 짙게 얹히기 시작했다.
그 시절 회식은 지금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일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퇴근 뒤 대폿집에 모여 소주잔을 주고받는 시간은 고단한 하루를 털어내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다시 조직 안으로 묶여 들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상사는 술잔을 돌리며 수고를 치하했고, 직원들은 술기운을 빌려 평소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회식은 억눌린 감정을 잠시 풀어놓는 통로였고, 다음 날 다시 같은 속도로 돌아가기 위한 재정비의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을 낭만적인 추억으로만 말할 수는 없다. 회식은 사람을 다독이는 시간이면서도, 조직이 개인의 저녁까지 거두어 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다만 그 시절 많은 직장인에게 회식은 선택이라기보다 버티기 위한 생활 기술에 가까웠을 것이다. 혹독한 노동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퇴근 뒤 밥상에서라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하루를 견뎠다.
서울의 밤이 회식을 키웠다
그렇게 버티듯 이어지던 회식은 어느새 서울이라는 도시의 밤 풍경과도 단단히 얽히게 됐다. 산업화가 빨라질수록 사람들은 일자리를 따라 서울로 몰려들었고, 서울은 단지 큰 도시가 아니라 성공과 생존이 함께 걸린 장소가 됐다. 수많은 기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직장인들이 밀집하는 업무지구가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아침이면 사람들은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그 빌딩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밤이 되면 다시 쏟아져 나왔다. 그 거대한 이동은 상권을 바꾸고 식당과 술집의 지도를 바꿨다. 회식 문화는 사람들 사이의 습관만이 아니라, 서울의 저녁과 함께 자라난 도시의 공기이기도 했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퇴근 뒤의 공기는 조금씩 달랐다. 광화문·종로 일대는 오래 버텨온 사람들의 저녁에 가까웠다. 노포에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하루를 마무리하는 묵직한 시간. 여의도는 달랐다. 낮의 긴장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는 저녁, 폭탄주와 접대 문화가 가장 오래 살아남은 곳이기도 했다. 강남은 또 달랐다. 스타트업과 외국계 기업이 몰리면서 술자리보다 맛집 탐방이나 가벼운 네트워킹 쪽으로 일찍 방향을 틀었다. 회식은 일하는 지역의 성격만큼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넥타이를 푼 밤의 풍경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회에서 서비스업과 사무직의 비중은 빠르게 커졌다. 이른바 화이트칼라 계층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시기다. 육체노동이 줄었다고 해서 일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서류와 숫자, 보고와 결재, 실적과 경쟁이 만들어내는 다른 종류의 피로가 사무실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밤을 밝히던 회식 문화도 이 무렵부터 더욱 선명하게 화이트칼라 직장인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회식은 화이트칼라 직장인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가장 익숙한 방식 가운데 하나가 됐다. 무교동의 매운 낙지볶음집이나 마포의 돼지갈비 골목이 퇴근 뒤 넥타이 부대로 붐볐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낮 동안 눌려 있던 긴장은 저녁 모임에서 한꺼번에 풀리곤 했다. 회식은 업무를 끝낸 뒤의 사적인 저녁이라기보다,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조직 안에서 함께 배출하는 방식으로 읽혔다.
특히 이 무렵의 회식을 떠올리면 폭탄주 문화가 빠지지 않는다. 맥주잔 속에 소주를 가득 채운 소주잔을 떨궈 단숨에 들이켜는 방식은 빨리 취하고 빨리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 익숙한 시대의 속도감과도 닮아 있었다. 서열의 벽을 잠시 흐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서열을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넥타이를 머리에 매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던 장면은 우스운 추억처럼 남아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대 화이트칼라 회식의 피로와 압박이 한데 응축된 모습에 더 가깝다.
끝났는데도 끝나지 않는 밤
한국의 회식은 한 끼 식사로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밤이 단계적으로 길어지는 흐름에 가까웠다. 1차는 삼겹살집이나 횟집에서 시작되고,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다음 장소 이야기가 나왔다. 회식이 길수록 성의가 더 크게 읽히던 시절에는 자리를 끝내는 일보다 이어가는 일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에게 회식은 단순한 저녁 약속이 아니라, 새벽까지 길게 이어진 기억으로 남아있다.
1차는 대개 삼겹살집이나 횟집에서 시작됐다.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막내는 묻지 않아도 집게를 들었고, 빈 잔을 살폈고, 상사의 잔이 비기 전에 눈치를 챘다. 건배사가 한 바퀴 돌고 나면 분위기는 풀린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위치가 다시 한번 확인된 뒤였다. 식사 모임처럼 보였지만, 1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직의 질서를 몸으로 익히는 시간이었다.
2차는 풀리는 시간처럼 보였다. 호프집이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면 넥타이가 느슨해지고 웃음소리가 커졌다. 누군가는 마이크를 잡았고, 누군가는 그 마이크를 억지로 건네받았다. 사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 자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 끝까지 남는 사람, 술을 받는 사람과 슬쩍 피하는 사람. 2차는 1차보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각자의 처세를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회식의 결이 갈린다.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은 가방을 챙기면서 눈치를 한 번 살폈고, 남는 사람은 남는다는 사실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포장마차나 감자탕집으로 이어지는 3차에서는 업무 이야기와 사적인 이야기가 뒤엉켰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제야 비로소 속내를 꺼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일 출근을 생각하며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 회식이 끝나는 건 집에 들어서는 순간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피로가 가실 때쯤 비로소 전날부터 이어진 하루가 완전히 끝났다.
저녁을 회사 밖으로 돌려놓는 사람들
영원할 것 같던 회식 문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누군가 규칙을 바꾸자고 나서서가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안 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운동이 있다고 했고, 선약이 있다고 했고,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처음엔 눈치를 봤지만, 그 눈치가 점점 옅어졌다. 퇴근 후의 시간은 회사의 연장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이 놓이는 자리라는 감각이, 말로 선언되기 전에 먼저 행동으로 나타났다. 왜 그 저녁까지 회사가 가져가야 하는지를 묻는 목소리는, 사실 오래전부터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시간 감각이 있다. 퇴근 후의 시간은 회사의 연장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이 놓이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한때 단합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회식에 빠지면 눈치가 보인다는 말이 그 문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회식 참석도 업무 평가에 들어가나요?"라는 질문이 더 낯설지 않다. 이 질문은 예의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회식을 둘러싼 기준이 달라졌다는 신호에 가깝다. 회사 밖의 시간까지 충성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약해지고, 함께 어울리는 방식도 강제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진 것이다. 회식을 거부하는 세대가 등장했다기보다, 회식에 기대하는 질서가 달라졌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사람을 잇는 자리, 사람을 지치게 하는 자리
그렇다면 회식은 무조건 사라져야 할 악습일까. 오랜 시간 회식 문화가 버텨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회식의 가장 큰 장점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오가기 어려운 말을 풀어놓게 한다는 점이다. 사무실 책상 사이에서는 건네기 어려운 위로와 조언이, 밥상 앞에서는 조금 더 쉽게 오간다. 부서 사이의 거리감을 줄이고, 서먹했던 사람들 사이의 오해를 풀며, 때로는 일의 실마리가 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도 한다. 잘 운영된 회식은 조직에 숨통을 틔우는 시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도 가볍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회식이 너무 자주 친목이 아니라 위계의 시험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술을 권하는 압박, 사생활을 캐묻는 질문, 늦게까지 남아야 성의 있어 보인다는 눈치,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괴롭힘과 무례는 회식을 편한 자리가 아니라 버거운 자리로 만들었다. 다음 날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고, 건강과 비용 면에서도 부담이 적지 않다. 회식은 분명 사람을 묶는 기능을 했지만, 그 방식이 늘 건강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회식을 없앨지 말지의 흑백 논리가 아닐 것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사람을 연결하는 기능은 살리되, 억지와 소모는 덜어낸 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어떤 회사들에서는 회식의 형식만이 아니라, 회식을 여는 이유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새롭게 싹튼 모임 문화
견고하던 회식 문화에 큰 균열을 낸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저녁 모임이 끊기자 많은 직장인들은 뜻밖의 사실을 경험했다. 회식을 하지 않아도 회사는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한동안 멈춘 뒤에도 예전식 2차, 3차 회식으로 완전히 되돌아가려는 흐름이 크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회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어느 특정 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래 버텨온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 술자리가 정말 유대와 소속감을 두텁게 만드는 자리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계기였다. 회사에 대한 불만, 상사나 동료에 대한 불평, 타 부서 험담. 처음에는 그것도 고단한 하루를 털어내는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장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돈을 내고 술을 마시며 악감정을 쏟아내고, 다음 날 숙취와 피로를 안고 다시 출근하는 일. 그게 정말 직장 생활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성의 있어 보이고, 술잔을 받아야 가까워진 듯 여겨지는 방식은 점점 우리와 맞지 않게 됐다. 팬데믹은 그 변화를 더 분명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 시기 우리 회사는 전 직원이 하나씩 직무기록형 SNS를 갖는 캠페인을 벌였다. 누구는 블로그를 시작했고, 누구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나이테 SNS'라고 불렀다. 나이테가 나무의 시간을 품고 있듯, 직원들이 남기는 글과 영상에도 각자의 일의 시간과 성장의 흔적이 쌓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목재를 다루는 회사가 자기 일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도 드물다. 하루하루는 잘 드러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축적은 분명한 결이 되어 남는다.
물론 처음부터 글을 쓰는 일도, 영상을 남기는 일도 익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변화는 거창한 콘텐츠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먼저 업무 결재를 종이에서 화면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간단한 일지와 보고서부터 종이 문서 대신 네이버 블로그나 업무용으로 만든 네이버 카페에 올리도록 독려했다. 기록 문화는 재능 있는 몇 사람의 표현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업무를 추진하는 방식 자체를 조금씩 바꾸는 데서 시작됐다.
2주 전 금요일 저녁, 우리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공장장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우드가이버'의 구독자가 1,000명을 넘은 날이었다. 벽에는 축하 배너가 걸렸고, 케이크 위에는 '1000' 초가 꽂혔다. 건배사는 없었다. 대신 채널 이야기가 나왔고, 각자 SNS를 어떻게 키워볼지 이야기가 오갔다.
그날 모임에 함께했던 3년 차 직원은 다음 날 이렇게 말했다. "어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빨리 구독자 2000명이 되면 좋겠네요." 그러면서 자기 SNS도 어떻게 키워볼지 즐거운 고민이 생겼다고 했다. 예전 회식이 끝난 뒤 남는 것이 피로와 숙취였다면, 이런 모임 뒤에 남는 것은 다음 기록을 향한 마음이었다.
예전 회식이 관계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한자리에 묶어두는 방식이었다면, 지금 우리 회사의 모임은 각자가 쌓아온 시간을 함께 읽어주는 방식에 더 가깝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자리가 아니라, 꾸준히 자기 일을 기록해 온 사람이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되는 저녁이었다.
회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옮겨갔다. 함께 늦게까지 취기에 젖어가는 것보다, 서로의 나이테를 돌려보며 제안과 격려를 나누는 일. 술자리판 회식을 걷어낸 자리에서 싹튼 것들은, 그렇게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