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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3. 2023

덕천마을

가만히 눈을 감고 오래된 동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몸은 아주 오래전에 그곳을 떠났지만 기억의 일부는 여전히 투명한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다. 재개발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네.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옆집과 아랫집에서 뭘 해 먹는지 냄새로 다 알 수 있었던 마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름 덕천마을.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가족 같은 이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만든 세월의 물줄기는 많은 것들을 덮어버렸다. 그러나 몇몇 순간들은 삶의 흔적으로 남아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안양천 옆에 있었던 덕천마을은 높은 건물 하나 없는 낡은 동네였다. T자 형태로 자리 잡은 재래시장인 덕천시장이 있었고 10번 버스는 동네를 가로질러 달리면서 사람들을 태우고 다녔다. 아들딸 이름을 붙인 가게가 많았다. 늦은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시장에 장을 보러 나왔다. 엄마 손을 꼭 붙잡은 아이들은 뻥튀기나 꽈배기를 물고 있었고 불룩한 비닐봉지를 양손에 든 아줌마들은 행복해 보였다. 저녁거리를 사려는 사람들 뒤에는 언제나 노을이 걸려있었다. 고층아파트 하나 없는 동네는 모두 같은 풍경을 보면서 살았다. 같은 골목에 산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되고 이웃사촌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직업이나 집이 자가인지 월세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매일 신나게 놀았다. 골목은 가장 좋은 놀이터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금만 몇 개 그리면 하루종일 놀 수 있었다. 문방구에서 부모님 몰래 불량식품 몇 개를 사서 같이 나눠먹고 해가 질 때까지 얼음땡과 술래잡기를 했다. 모두가 빈손이었고 그래서 손을 잡고 같이 다니면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안양천 옆으로 길에 늘어선 애향공원은 아이들로 늘 가득했다. 처음 보는 애들이라도 함께 놀다 보면 친구나 다름없었다. 흙먼지가 얼굴에 들러붙을 때까지 웃으며 뛰어다녔던 시절이었다.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 많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빠듯한 살림과 넉넉하지 못한 환경이었지만 모두가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퇴근이 늦는 날이면 이웃사촌끼리 아이들을 맡아주고 저녁을 먹이고 재웠다. 얼굴만 보면 밥 먹고 가라는 인사가 상식이었고 손수 만든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은 인정이었다. 셋방과 주인집도 음식을 주고받는 이웃이었다. 없을수록 나누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들. 이제 찾아볼 수 없는 온정이 가득했던 기억 속의 오래된 마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 그리운 모습들이 아른거린다. 눈꺼풀 안쪽으로 떠오르는 풍경. 기억 속에 추억으로 남은 얼굴들. 나의 유년시절을 품고 있는 덕천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