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가 많은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벌레를 보고 놀라는 일이 없는 편이다. 거미나 바퀴벌레 그리고 돈벌레를 보면 쫓아내거나 가만히 놔둔다. 우리 가족은 늘 벌레와 함께 살았다. 불편한 공존이었다. 인간은 환경에 익숙해진다. 타인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상하겠지만 원래 삶은 정답이 없다. 어린 시절 살았던 빌라는 바퀴벌레가 많았고 교회 2층의 사택은 개미까지 있었다. 장마철에는 모기만큼 거미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집안 구석구석 습한 곳을 찾아 거미가 진을 쳤다. 해충을 잡는 익충이라지만 밤마다 천장을 기어 다니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쌀벌레도 여름마다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성충이 돼서 날아다닐 때 잡지 않으면 천장에 들러붙어 알을 깐다. 수십 마리의 애벌레가 창고 천장을 기어 다니는 풍경은 달갑지 않았다. 오래된 다세대주택은 햇살이 뜨거워지는 늦봄이 되면 말벌이 집을 짓는다. 코로나 이후 벌의 개체수가 급감하면서 말벌도 모습을 감추긴 했지만 해마다 말벌을 잡느라 고생했다. 지금 사는 안양8동은 산림욕장 아래 자리 잡은 동네다. 산에 꽃나무가 널려있다 보니 봄여름 내내 벌이 많이 날아다녔다. 한 번은 동네편의점에 말벌이 들어와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던 적도 있다. 콜라를 사러 갔던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들고 있던 파일철을 빌려서 말벌을 내리쳤다. 그 덕에 콜라를 공짜로 받았다.
불편하게 보이는 삶에도 좋은 점은 있다. 불편함에 적응하고 나면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이 생긴다. 집에서 온갖 종류의 곤충을 보다 보니 벌레들이 최선을 다해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기는 피를 빨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든다. 거미는 집이 무너지면 몇 번이나 새로 짓는다. 바퀴벌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살아남는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벌레들은 상생을 지향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더라도 공격하거나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먹이사슬로 엮이지 않는 관계라면 다투지 않고 늘 공존했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적당히 타협하고 눈감아주면서 지낸다. 그 모습을 보면서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벌레를 보면 손으로 잡아서 집 밖에 풀어주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커다란 사마귀가 어깨에 붙어서 집까지 따라온 적이 있다. 사마귀는 내가 집게로 떼어낼 때까지 내 어깨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으로 어깨를 몇 번 두드리자 날갯짓을 하면서 공원을 향해 사라졌다. 벌레에게는 벌레의 사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여겼던 것 같다. 사람은 살면서 불편함 속에서 나름의 해법을 찾아낸다. 누군가는 벌레가 나오는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별 탈 없이 잘 살아남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환경은 한 사람의 인생과 맞닿아있는 세계관이다. 그 삶을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이런 삶도 있다. 어떻게 살든 삶은 그냥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