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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8. 2023

스물네 명

 24. 교회에 가장 사람이 많았을 때의 숫자다. 그때는 성가대가 있었고 중등부와 고등부도 있었다. 집사님들이 주변 지인들을 데려오는 날에는 24명을 넘어갈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주일마다 사람 수를 세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좋았다. 지하에 위치한 교회는 사계절 내내 냉기가 감돌았다. 사람들이 가져온 온기가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분위기를 여전히 기억한다.  시절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 교회의 행복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IMF 터졌다.


 8.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집사님들은 직장과 사업문제로 안양을 벗어나  도시로 떠났다. 청년부 맏형은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교회를 옮긴 형과 누나들이 늘어났다. IMF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직감했다. 떠나는 사람이나 남겨진 사람이나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보던 얼굴들이 사라진 교회에 남는 것이 외로웠다. 지하 교회는 다시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3 터울의 교회 형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유초등부는  혼자 남았다. 98년에 접어들면서 이웃처럼 지냈던 집사님  분도 교회를 떠났다. 남은 사람은 우리 가족과 칠순을 넘긴 고령의 집사님  분이 전부였다.


 가끔 동네를 지나다 교회 십자가를 보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등록하고 성도가  사람은 없었다. 몇 번 나오다   교회로 발길을 옮겼. 우리 교회는 정류장 같았다.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그런 곳처럼 느껴졌다. 잠시 들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엄마와 아빠는 기대를 걸었지만 매번 무너졌다.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고령의 집사님은 노환으로 인해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아빠는 봉고차를 몰고 매주 집사님을 태워드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에 손잡이까지 달았다.   명뿐인 교인을 잡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집사님 만이 마지막까지 우리 교회를 지켰다.


 3. 교회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기도회 그리고 주일예배까지   뿐이었다. 연로한 집사님은 요양을 위해서 안양을 떠났다. 아빠는 설교를 하고 엄마와 나는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래야  명이라도  많아 보인다는 엄마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지하교회 가득 늘어서있는   의자를 냉기와 침묵이 채웠다. 아빠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렸고 나는 일요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곰팡이 냄새가 심했던 여름에도 난로 하나로 버텼던 겨울에도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문을 닫는 날까지 이변없었다. 우리 교회의 마지막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때로는  편리하게 작용한다. 기억하고 깊지 않은 순간들을 하얗게 날려버리기도 한다. 외로워서 괴로웠던  시간들은 교회와 함께 사라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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