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첫인상보다 더 강한 흔적을 남기는 것 같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덕천마을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공사가 시작된다는 뉴스를 듣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오래된 동네를 찾았다. 공사 때문에 마을이 폐쇄되면서 걸어서 덕천마을로 들어갔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2차선 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중앙선을 밟으면서 걸어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건물마다 붉은 빛깔의 섬뜩한 문구를 담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재개발로 인한 갈등이 극심했다는 사실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덕천마을은 빛을 잃은 낡은 사진처럼 흑백으로 변해있었다. 환한 대낮이었지만 마을 중심의 시장골목은 차가운 그림자로 덮여있어 어두웠다. 단골이었던 할머니 떡볶이 집이 있던 상가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던 덕천풍물시장거리는 무거운 고요함이 감도는 상태였다. 떨어진 간판과 상인들이 떠나면서 두고 간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주민들이 사라지면 마을은 온기를 잃는다. 사람은 도시의 생명력 그 자체다. 동네의 수명은 결국 동네사람들이 만든다. 아무도 없는 버려진 마을은 그래서 순식간에 망가진다. 어린 시절 다녔던 속셈학원 건물은 창문이 모두 떨어져 나갔고 자주 갔던 마트는 유리문이 깨져있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립주택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낡은 빌라촌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밤새 내린 눈이 만든 새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은 하나도 없었다.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마을은 세상이 멸망하고 난 후의 폐허처럼 고요했다. 필름카메라의 셔터 소리는 그래서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한참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다 집에서 챙겨 온 샌드위치와 우유를 꺼내 먹었다. 음식 냄새를 맡고 고양이 몇 마리가 건물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샌드위치를 잘게 찢어 나눠줬다. 내 발자국 위로 고양이 발자국이 겹쳐서 찍혔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신기한지 고양이들은 나를 따라다녔다. 차도 사람도 없는 폐허 속에서 고양이 몇 마리와 같이 다니면서 사진을 남겼다. 폐품을 수거하는 사람들이 돈이 될 만한 구리전선이나 금속문짝을 모두 뜯어갔다. 사람이 살던 흔적은 가득했지만 생기를 잃은 건물은 조용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걷다 우리 가족이 살았단 옛날 집에 들렀다. 교회의 첨탑은 녹이 슬어서 군데군데 빨간 핏물을 흘린 것처럼 보였다. 다른 교회의 이름이 적혀있는 간판은 반쯤 찌그러져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마을의 모습과 다르게 건물옥상에서 바라본 11월 하늘은 정말 맑았다. 건너편 비산동의 아파트 단지는 청명한 하늘에서 내려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첨탑이 만든 그늘 속에서 그 풍경을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황량한 풍경들이 늘어서있었지만 기억 속의 익숙한 모습은 그리움을 불러왔다. 아쉬움과 뒤섞인 그리움은 복잡한 감정이었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 매일 같이 들렀던 동네 슈퍼, 이웃사촌들과 인사를 나누던 시장과 우리 가족의 추억을 품은 교회까지.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전부 사라졌지만 추억은 흘러간 시간의 색을 도로 입혀줬다. 영화처럼 두 개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로 가득한 과거의 시간과 사람 하나 없는 현재가 동시에 보였다. 그 속에서 착실하게 살았던 동네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똑같은 옷을 입고 통닭 한 마리로 온 가족의 외식을 대신했던 사람들. 그들은 덕천마을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메가트리아에서 인생의 2막을 시작했을까? 해가 기울자 마을 곳곳을 짙은 그림자가 덮기 시작했다. 빠르게 몰려오는 검은 파도 같은 어둠을 피해 마을 밖으로 나왔다. 환한 불이 들어온 비산동 아파트 단지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거기서 바라본 내 유년시절의 동네는 어둠 속에 잠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새끼만 이불을 덮고 잠든 덕천마을의 마지막 모습은 적막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요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