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여름만 되면 덕천마을은 물난리가 났다. 홍수로 인해 온 동네가 물에 잠긴 적도 있었다. 빗물이 집으로 쏟아져 들어와 세간살이를 못쓰게 되는 일도 흔했다. 장마철에 큰 비가 내리고 나면 햇빛에 젖은 가구나 그릇을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거의 해마다 하천이 범람해서 애향공원 너머 안양7동과 비산동을 잇는 다리가 끊어졌다. 폭우로 인해 무섭게 불어난 물은 다리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탁한 강물은 누런 갈기를 달고 달리면서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동네 사람들은 공원에 길게 늘어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말없이 장마가 만든 참혹한 현실을 목격했다.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린 다리의 모습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장대비가 만든 회색빛의 커튼이 온 동네를 덮는 날에는 난간 위로 강물이 차올랐다. 친구랑 천변을 걷다가 밀려드는 강물을 피해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자연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재해가 더 혹독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당시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친구들은 폭우로 인한 침수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난리는 늘 다세대주택이 늘어서있는 덕천마을에서 일어났다. 여름이 되면 애향공원 건너편의 비산동에 사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큰 비가 내린 주일에는 교회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부터 물었다.
공장이 많았던 덕천마을은 지하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큰 비가 내리면 아예 집 밖으로 중요한 물건들을 한 아름 안고 나와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엄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름은 생활이 문제고 겨울은 생존이 문제라는 말을 종종 했다. 우리 가족이 겪었던 일이라 그 말은 진실이 주는 깊은 무게감이 있었다. 모두가 여름 더위를 걱정할 때 큰 비가 오지 않을까 불안한 사람도 있다. 산을 수놓은 고운 단풍을 보면서 겨울이 몰고 올 지독한 한파를 걱정하는 삶. 그런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은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만 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의 힘든 상황을 보고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 때 돕고 슬플 때 서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그런 곳이었다.
안데르센 동화처럼 가난한 사람이 착한 것도 아니고 부자들이 나쁜 것도 아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자연스레 고생을 하게 된다. 그 아픔을 아는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아주는 것뿐이다. 내가 돕지 않으면 다음에 내가 힘들 때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동네 어른들은 어려울수록 돕고 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경험지식이었다. 수해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뉴스가 나올 때면 어린 시절의 장마철이 생각난다. 엄마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방송국에 수해지원성금을 냈다. 아빠는 쌀을 몇 포대 사서 장마로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나눠준 적도 있었다. 자기만 아는 나뿐 인 놈은 결국 나쁜 놈이 된다는 엄마의 말은 그래서 흘려들을 수 없는 잠언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