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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l 11. 2023

1990년대

 과거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어두운 이면을 품고 있다. 일본 버블경제시기의 낭만을 품고 있는 시티팝은 감성적이지만 정작 버블붕괴 이후 일본은 끔찍한 혼란을 겪었다. 뉴트로 무드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한국의 90년대도 비슷하다. 내가 기억하는 90년대는 빛과 어둠의 대비가 너무나 극명한 시대였다.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도 있었지만 비인간적인 범죄와 국가적인 재난이 줄을 이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백화점이 무너졌고 대낮에 다리가 끊어졌다. 어린아이들은 캠프를 갔다가 참변을 당했고 국가부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은 사건사고를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같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생년월일과 집전화번호가 새겨진 팔찌를 채웠다. 실종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유괴를 막으려고 정부는 애를 썼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내내 낯선 어른을 조심하라는 말을 인사말보다  많이 들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치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인구밀도가 높은 주택단지는 서울이나 지방이나 좀도둑이 극성이었다. 2000년대가 되면서  10시를 저녁처럼 생각하는 인식이 생겼지만 90년대의  10시는 그야말로 심야였다. 밤새 일어난 온갖 범죄는 다음날 신문과 뉴스를 통해 이슈가 되었다. 사회적인 불안과 욕망이 불러온 사이비가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온갖 사건들이 발생했다. 지금은 유튜브나 예능에서 다루는 사고를 당시에 저녁뉴스로 보면서 세상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시기가 이어지다 IMF 찾아왔다.


 IMF 발생하기 전의 90년대는 국민소득이 늘면서 여유로웠다고 묘사되지만 실상은 달랐다. 격차를 본격적 체감할  있었던 시기가 90년대였다.  학기에 사귄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부모의 직업이나 집안환경을 물어보는 어른들이 늘어났다. 고만고만한 연립주택에서 살던 이들이 아파트붐을 타고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사는 세상이 달라졌다.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친하게 지낼 아이와 멀리해야  아이를 별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반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차별이 존재했다. 백화점 사장 아들이었던 친구의 생일에 나는 초대받았지만 다른 친구는 연락받지 못했다고 했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빈말이 되어버렸다. 아마 이때부터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고 남들처럼 살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비교가 시작된  같다. 시대는 인간의 가치관을 만드는 초석이 되고 세대는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없다.  시기의 부모들이 만든 인식론은 성장기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남을 짓밟으면서 경쟁에서 이기고 협력하기보다 싸워서 빼앗으라는 말이 미덕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도움이 되는 사람과 가치 없는 인간을 구별해야 한다는 인식도 이때부터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IMF 기점으로 격차는 확연하게 구별할  있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만안구에서 평촌이 있는 동안구로 이사  아이들은 하나  소식이 끊겼다. 아이들이 어울리는 무리를 고르는 일에 부모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같은 동네에서 친구들과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없게 되었을  이상하다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행복과 아이들의 행복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같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에게나 90년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나사가 빠져서 어딘가 망가진 기계처럼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낭만은 추억의 보정 그리고 기억의 왜곡으로 인해 발생한다. 즐거운 기억은 가족과 보낸 시간과 친구들과 만든 추억들이 대부분이었다. 낭만보다는 기괴함이 지배했던 시대가 90년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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