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풍물시장 안에 있었던 할머니떡볶이는 내 단골집이었다. 진한 녹색의 비닐천막으로 덮여있는 기다란 가건물 안에 있었던 분식점. 미닫이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면 늘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언제나 아이들로 붐비는 인기 있는 곳이라 자리가 없을 때도 많았다. 학교 끝나고 찾아가면 초등학생들이 가득했고 늦은 오후를 넘어가면 중고등학생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저녁 시간에는 떡볶이를 사가는 회사원과 주부들도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떡볶이집은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손이 빠른 할머니는 혼자서 그 많은 손님들의 주문을 너끈하게 처리했다.
산더미처럼 많은 밀떡에 육수와 양념을 넣고 휘휘 저어가면서 떡볶이를 만들어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자주 구경했다. 하얀 사골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가며 만든 떡볶이는 달콤하면서도 매콤해서 정말 맛있었다. 소고기의 깊은 감칠맛과 달달한 양념은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튀김을 적셔먹어도 될 만큼 간이 딱 맞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살면서 많은 떡볶이집을 가봤지만 할머니집 떡볶이만큼 맛있는 곳은 없었다. 맛도 좋았지만 가격도 저렴했다. 떡은 100원에 네 개, 튀김은 한 개에 200원이었다. 특히 식빵을 대각선으로 썰어서 튀겨낸 식빵튀김이 별미였다. 계란물과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후에 설탕을 솔솔 뿌린 식빵튀김은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진하면서도 달콤한 떡볶이 국물에 푹 적셔서 먹었던 식빵튀김의 맛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맛도 가격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인심이었다.
떡볶이를 단돈 200원어치만 사도 큼지막하게 썬 파와 삼각형 모양의 오뎅을 여러 개 넣어주셨다. 어린아이들 여럿이 주문하면 떡을 넉넉하게 담아주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 친절한 어른의 모습은 아이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IMF 경제위기로 생활이 힘들어지고 인심이 팍팍해지던 때에도 따뜻한 마음은 한결같았다. 별말씀도 잘 안 하시고 인상도 조금 무뚝뚝해 보였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떡볶이 500원어치를 아이들이 나눠먹고 있으면 튀김 몇 개를 그냥 얹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 따뜻한 마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든 시절은 유난히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90년대 말에 결식아동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생겼다.
급식비가 밀려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아이들이 많았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등교를 못 하게 된 반친구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마음 편히 먹지 못한다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밀린 급식비 때문에 복도에서 벌을 서거나 교무실에 불려 가서 혼나는 친구들을 봤다. 돈 없으면 밥 먹지 말라는 말을 내뱉는 선생님의 매정한 모습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떡볶이집 할머니의 한결같은 인심에 더 크게 감동했던 것 같다. 중학생 시절 이사를 간 뒤로도 떡볶이 집을 찾았고 고등학교 동아리 후배들과 갔던 적도 있다. 맛과 인심은 시간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나는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당시 여자친구와 함께 떡볶이를 나눠 먹으면서 결혼하고 애 낳고도 오겠다고 할머니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재개발로 사라지면서 이제는 추억 속에 남은 떡볶이집.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은 아이들에게 친절한 어른이 되자는 결심으로 내 안에 남아있다. 진심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