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우유를 정말 많이 먹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우유를 매일 달고 살았다. 친한 친구들은 내가 송아지보다 우유를 많이 마신다고 놀릴 정도였다. 학교에서 우유급식을 하면 늘 우유가 몇 개씩 남았다. 흰 우유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선생님 몰래 네스퀵이나 제티를 가져와서 타먹기도 했다. 우유를 남기는 것은 자유였다. 그래서 남는 우유는 원하는 사람이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남은 우유는 대부분 내 차지가 되었다. 먹기 싫은 친구들이 내게 우유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내 가방 속에는 늘 2,3팩의 우유가 들어있었다. 별 것 아니었지만 우유를 챙겨 집에 갈 때면 늘 기분이 좋았다.
챙겨 온 우유를 가족이나 친구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쉽게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사는 게 다 비슷비슷했고 차이가 나더라도 함부로 차별하지 않았다. 지금이 훨씬 더 살기 좋은 시대지만 사는 게 각박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유난스러운 사람들은 있었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부모의 직업을 묻는다거나 집이 전세인지 자가인지 질문하는 어른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조금 달랐다. 어차피 학교에서 집안이 넉넉하든 궁핍하든 모두 똑같은 하얀 우유를 마셨다.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집안 형편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친구라고 불렀다. 어려운 시절에는 그런 마음이 빛을 발했다.
IMF를 기점으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급식비를 밀리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급식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서 수업시간 내내 혼냈다. 그때의 학급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혼나면서 고개 숙인 채로 우는 아이도 있었다. 본인 학급 아이들에게 집이 망한 거냐면서 상처를 주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종이 울리고 담임이 나가면 그제야 아이들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어느 누구도 집안 사정을 가지고 놀리지 않았다. 앞에 나서서 친구를 도울만한 용기는 없었지만 아무 말없이 평소처럼 대하는 것이 배려이자 선의였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100원짜리 쭈쭈바를 반으로 갈라 나눠먹고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친구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피시방비를 내주기도 했다. 친구를 집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고 소외받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반 친구에게 자주 우유를 가져다줬다. 선의나 호의가 아니라 친구끼리 마음을 나누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어른들이 허리띠를 졸라가며 고생했던 시절. 아이들 역시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어려운 날들을 이겨냈다. 부족하면 나눠 쓰고 모자라면 함께 힘을 모았던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가끔 마트 냉장코너를 돌 때면 200ml 작은 우유팩이 눈에 들어온다. 다 같이 교실에 앉아서 하얀 우유를 나눠 마셨던 그 시절의 친구들은 다들 어디에 있을까. 힘든 시기를 함께 보냈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