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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8. 2023

대농단지

 우리 가족은 여러  이사를 다녔다. 덕천마을을 뒤로하고 이사  동네는 박달동의 대농단지였다. 대농단지도 덕천마을처럼 높은 건물을 찾아볼  없는 낡은 동네였다. 유일하게 우뚝 솟은 건물은 안양월드 하나뿐이었다. 안양월드 앞에 고물상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물상 옆에 우리 가족이 살던 빌라가 있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빨간 벽돌로 지은 비슷하게 생긴 연립주택이 가득한 동네였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비슷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누굴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동네는 조용한 편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친구도 금방 사귈  있었다.


 골목에서 만나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정작 대농단지에 대한 추억은 적은 편이다. 아마도 자주 이사를 다녀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덕천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대농단지 근처의 안양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러다 3년쯤 지나서 덕천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4 후에 또다시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대농단지로 주소를 옮겼다. 성장기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던  시기에 집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교회 문을 닫아야 했고 집안문제로 타지의 친척집에서 방학을 보낸 적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사춘기였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힘들 때면 친구들을 만났다. 외로울 때는 학교에서 밀려온 책을 읽으며 견뎠다.


 대농단지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있다. 시간의 흔적인 기억을  마음대로 골라 담을 수는 없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행복한 적도 없었다. 행복한 순간은 거품처럼 쉽게 사라진다. 반대로 잊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세월의 수면아래서 솟구쳐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추억은 아름답게 남아있다. 페트병에 얼린 보리차를 들고 다른 손에는 잘게 부순 생라면 봉지를 쥐고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우리는 안양월드 1층에 있는 게임기매장에서 주인아저씨가 게임하는 것을 구경했다. 안양공고 뒤편의 놀이터에서 해가  때까지 얼음땡을 하며 놀기도 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동네 친구들은 서로가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줬다.


 시간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니다. 때가 되면 지나가고 때를 넘기면 흘러간다. 대농단지에 살았던 그때의 나는 어떤 꿈을 꾸고 무엇을 원하면서 지냈을까. 기억의 조각들을 아무리 맞춰봐도 완성되지 않는 퍼즐도 있다. 그럴 때는 그저 인정하거나 아니라면 그냥 지나가야 한다. 덕천마을은 사라졌지만 댕리단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대농단지는 아직 남아있다.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천천히 걷다가 옛날에 살았던 골목까지 발길이 닿았다. 오래된 동네는 그대로였다. 고물상이 사라진 자리에 신축빌라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똑같았다. 친구와 나는 말없이 오래된 골목길을 바라보다 돌아갔다. 여전히 조용한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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