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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8. 2023

나의 부모님

 실패는 쓰다 그리고 실패가 반복되면 속이 쓰리다 못해 가슴까지 쓰라리고 괴롭다. 나는 숱하게 실패했다. 간절하게 바라는 꿈이 좌절될 때마다 여러 번 방황했고 무기력 앞에 세월을 흘려보낸 날도 길었다. 그렇게 잔뜩 두드려 맞고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상처 입히면서 나이를 먹었다. 내 나이가 무서운 시기를 지나자 가족들의 나이가 보였다. 그리고 큰 실패를 겪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부모님 두 분의 40대 시절이 눈에 들어왔다. 고군분투하면서 최선을 다했던 두 사람의 삶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만 보고 살았다. 그 후에는 꿈만 보고 살았다. 내 삶은 분명 내 것이 맞았다. 그러나 그 삶을 만들어준 가족이라는 존재를 늘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부모도 그렇다.


 아빠는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이었다. 전체수석을 차지하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교수와 목회의 길을 놓고 고민했다. 아빠를 착실하게 뒷바라지했던 엄마는 농고를 나와서 보건공무원 생활을 했다. 80년대에 대학원까지 졸업한 아빠는 유서 깊은 대형교회의 부목사가   있었다. 당시 대학원 동기 중에서 가장 성공한 커리어를 달았다. 기독교 집안이었던 친가와 외가 모두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엄마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모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학위까지 취득했다.   모두 열정적인 30대를 보냈던 것이다. 성공은 가슴에  뜻을 품게 만들었다. 아빠는 지방을 벗어나 수도권에서 개척교회를 열기로 했다. 스카우트를 받고 안양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든 급변할  있는 것이었다.


 개척교회에서 시작한 목회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서울과 수도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만큼 교회도 크게 늘어났다. 동네에 슈퍼보다 교회가  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좋은 커리어와 학위가 있다고 해도 일단 신도가 많아야 했다. 부모님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빠졌다. 엄마는 공장을 니면서 생계를 책임졌. 가세가 기울면서 빚도 생겼다. 피아노반주를 담당하고 성가대를 이끌던 엄마의 모습은 사라졌다. 덕천마을을 떠나면서 시집올  외삼촌이 사준 하나뿐인 피아노를 팔았다. 그날 엄마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우리는 여러  이사를 했고 엄마의 일터는 공장에서 건물청소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방학 때마다 엄마와 나는 함께 건물청소를 했다.  생애  아르바이트였다.


 드라마라면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빠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목사라는 이름으로 강단에 설 수 없었다. 나는 교회도 소속도 없는 목사의 아들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소망은 희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두 분은 쭉 내리막을 걸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두 분을 인정하고 존경한다. 청소일을 하면서도 엄마는 경기도의회가 수여하는 봉사표창장을 최초로 두 번이나 탔다. 큰 실패를 겪었지만 아빠는 피땀 어린 노력으로 우리 집만큼은 지켜냈다. 두 분의 삶은 이렇게 버텨낸 것만으로 박수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분의 삶은 살아낸 것만으로 이미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랑스러운 두 분의 인생에 박수와 찬사 그리고 사랑을 보낸다. 나는 부모님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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