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평범한 하루의 기록
아침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신호등 앞에 늘어선 사람들과 바쁘게 도로를 오가는 버스를 보면서 연말이든 새해든 똑같은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 없는 아침이지만 맑은 날씨에 기분이 좋다. 하얀 겨울 풍경이 있는 연말은 아니지만 모처럼 햇살이 맑은 12월 31일도 나쁘지 않다. 다시마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아침으로 먹고 나는 청소를 시작한다. 방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실내의 탁한 공기를 환기 시킨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하늘은 연한 푸른 빛. 유난히 따스한 햇살 덕분에 바람은 차갑지 않고 시원했다. 맑은 바람이 불어와 무겁고 탁한 방안의 공기를 밀어낸다.
청소기로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들을 빨아들이고 깨끗이 빤 걸레로 탁자와 선반 그리고 소파까지 꼼꼼하게 닦아낸다. 향초를 꺼내 불을 붙여두고 이불을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가 먼지를 턴다. 환한 햇살 사이 이불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들이 느리게 피어오르다 연기처럼 사라진다. 무거운 집안의 공기가 밀려나간 자리에 산뜻하고 깨끗한 바깥바람이 들어온다. 향초에서 피어오른 체리 향이 은은하게 퍼진 방안에 보일러를 틀자 금세 따스한 온기가 돌아 청소 후의 고단함을 나른함으로 바꿔놓는다.
책꽂이에 잔뜩 꽂혀있던 책을 꺼내 정리한다. 중고서점에 가져갈 책들은 골라내어 노끈으로 묶어두고 어지러운 책상도 함께 정리한다. 그리고는 아직 사놓고 읽지 않은 책과 며칠 전 선물 받은 책을 책상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아둔다. 내일, 1월 1일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옷장을 열어 세탁 해둔 셔츠들을 꺼내 곱게 다림질 한다. 스팀을 충분히 먹여 미세한 주름을 정성스럽게 펴다보면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고 놀러 가고 싶은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예쁘게 각이 잡힌 셔츠를 나란히 옷장에 걸어두고 니트와 가디건을 꺼내 섬유방향제를 뿌린다. 옷장 벽면을 가득채운 넥타이들이 유난히 예뻐 보여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친구에게 보내자 넥타이를 잘 고른다며 센스 있다는 칭찬이 답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는 잘 매지 않았던 줄무늬 니트 타이를 고르고 코트를 꺼내 입는다. 대문 밖을 나서니 바람이 꽤 찼다. 아침보다 해가 조금 기울어진 탓인가 보다. 자주 가는 서점에 들러 선물할 책을 고른다. 선물 받을 사람의 특징에 맞는 책을 고르는 일은 늘 즐겁다. 친구가 선물해준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가 마음에 들어 두 권을 산다. 전혀 다른 두 성격의 친구를 위한 선물이다. 성격은 달라도 섬세한 면을 가진 두 사람 모두 책을 받고 기뻐할 것 같다. 예쁜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들을 둘러보다가 표지가 예쁜 하루키의 잡문집도 구매하기로 한다. 밀란 쿤데라의 읽어 보지 않은 소설도 산다. 서점을 갈 때면 늘 큰 백팩을 가져오는 건 다 이런 충동구매 때문이다.
서점을 나와 핫트랙스에 들러 예쁜 포장지와 귀여운 종이가방도 샀다. 바로 옆의 카페에 들러 선물할 책을 포장한다. 책 속지에 직접 그림도 그려 넣는다. 기분 좋은 새해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일러스트를 그린 달력이 완성되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사진을 통해 확인한다. 생각보다 더 귀엽게 잘 나왔다. 만화에 들어갈 시나리오를 두 편 정도 쓰고 늦은 오후가 되어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디샵에 들러 핸드크림과 스킨을 하나씩 산다. 코튼 향 핸드크림은 베이비파우더 냄새를 꼭 닮았다. 코튼 향 보다는 베이비파우더향이 어감이 더 친근하고 좋다.
스킨은 거의 향이 나지 않는 제품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남성용 스킨은 거의 일괄적으로 시원한 청량감이 나는 향을 쓰는 것 같다. 바를 땐 산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 무거운 향으로 바뀌는 탓에 요즘은 향이 적은 제품을 쓰게 된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바디로션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발길을 돌린다. 은은한 머스크 향을 써보고 싶었던 차에 ‘새해니깐!’ 이라는 핑계로 바디로션도 덜컥 구매한다. 청소를 하고 옷을 정리하고 선물할 책을 사고 또 글을 쓰고 좋은 향기가 나는 화장품도 샀다.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 케이크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해가 저무는 것이 눈에 보인다. 머리 위에 떠있던 해가 기울다 어둠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까만 겨울밤이 찾아왔다. 몇 시간 후면 2015년은 올해가 아니라 작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라진다.
새해 아침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겠지만 사람들은 12월 31일에는 찾아볼 수 없던 작은 설렘과 기대를 안고 아침이 되면 집을 나설 것이다. 오늘 같은 평범한 365일이 모여 1년을 만들어냈다. 아쉬운 일도 많았고 반대로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다. 아마 삶의 대부분은 그러니까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은 이런 사소한 하루들로 이뤄져있을 것이다.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어서 평범하다고 부르게 되는 날들이지만 그 평범함이 곧 편안함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새해의 새날들 역시 이런 편안함 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크게 소망하고 기대하며 2016년을 살아가겠지만 치열하게만 사느라 평범한 하루가 주는 편안함을 잊지 않도록 오늘 12월 31일의 사소한 이미지들을 기억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