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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컵을 수집하는 남자

수집은 삶을 기록하는 제법 멋진 방식이다

by 김태민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와 집 앞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건축가인 친구는 해외에 있는 안도 타다오가 지은 건물을 자주 답사하고 온다. 이번에는 일본의 한적한 마을에 있는 도서관을 보고 왔다고 했다. 불편한 교통편을 이용하는 고된 여정을 듣고 있자니 내가 다 피곤했다.


만족스러운 기행이었지만 친구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다. 여행 일정이 빠듯해서 스타벅스 시티컵을 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친구는 10년 전부터 스타벅스 컵을 수집하고 있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 가서 돌아올 때면 늘 다양한 종류의 컵을 사서 돌아왔다.


오늘도 친구는 커피를 고르기 전에 새로 나온 MD 상품을 둘러보면서 살만한 게 있는지 체크했다. 다양한 스타벅스 굿즈 중에서도 친구가 가장 아끼는 컬렉션은 스타벅스 시티컵이다. 친구네 집 장식장을 가득 채운 시티컵은 나라와 도시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없는 나는 그런 열정이 늘 신기했다. 옷이나 신발을 사는 것은 수집의 목적이 아니었다. 돌려가며 착용하기 위해서 여러 종류를 구비하는 것이었다. 필요해서 사는 것과 원해서 사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가격이나 조건이 맞다면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그러나 후자의 영역인 수집은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의미가 없다. 쇼핑은 취향의 영역이긴 하지만 100%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니라도 살 수 있다. 하나 살 가격에 둘셋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선호도는 밀려나는 법이다. 그러나 수집은 다르다.


간절하게 원하는 물건이 아니라면 타협할 수 없다. 취향이 200% 작용하는 영역이 수집인 것 같다. 친구의 생일에 스타벅스 컵을 선물한 적이 있다. 스타벅스 애호가라면 모두가 갖고 싶은 워너비 아이템. 스타벅스 1호점 파이크플레이스의 머그컵이다. 초창기 스타벅스 로고가 들어간 컵은 오직 시애틀 1호점에서만 판매하는 특별한 굿즈였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스타벅스 1호점 머그컵을 손에 넣게 되었다. 친구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고 있었을 때 당근마켓에서 컵을 판매하는 글을 발견했다. 빠르게 약속을 잡고 판매자를 만났다. 비가 오는 날이라 조심해서 오라는 배려심 깊은 판매자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쇼핑백에 담긴 1호점 컵은 박스까지 완전 새것이었다. 그녀는 파이크플레스에서 사 온 컵이 여러 개라 하나만 남기고 정리한다고 했다. 짧게 몇 마디를 나눴는데 제법 인상적인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시애틀에 간 김에 컵을 산 게 아니라 컵을 사기 위해 일부러 시애틀에 들렀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친구를 만나 선물을 건넸다. 쇼핑백 속 내용물을 확인하고 친구는 정말 기뻐했다. 나에게는 그저 흔한 머그컵이지만 친구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던 것이다. 약간 누런 빛깔에 옛날 스타벅스 로고가 들어간 디자인이 내 눈에는 그다지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다.


컵 한복판의 사이렌 그림이 중세시대 삽화처럼 어딘가 모르게 기괴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건이 가지는 의미다. 특별하다는 의미 그 자체가 가치가 된다. 원래 인생은 의미가 전부다. 추억도 사람도 감정도 모두 의미와 이어져있다. 흔한 머그컵이 소중한 아이템이 되는 의미는 스타벅스에 대한 애호가들의 애정만으로 충분했다.


물론 전 세계에서 딱 한 곳에서만 살 수 있다는 희소성 역시 한 몫했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치토스를 사면 얻을 수 있었던 따조를 200장 가까이 모았다. 오리온에서 출시한 스낵류에는 따조를 비롯한 다양한 굿즈들이 들어있었다. 지금은 단종된 화이트치토스나 체스터쿵 같은 추억의 과자들을 먹어가며 루니툰 캐릭터가 들어간 따조를 열심히 모았다.


시간이 지나자 포켓몬빵 열풍이 불었고 그때부터 열심히 띠부띠부씰 스티커를 수집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의 초등학생들은 스티커에 열광했다. 그러나 딱 그때까지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더 이상 수집에 열을 올리는 일은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물건을 모으는 취미생활을 딱히 즐긴 적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수집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심과 열정이 깃든 추억과 같다. 애착은 형성되는 감정이다. 둘 이상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애정과는 다르다. 애착은 혼자서도 만들 수 있다.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똑같다. 애착을 가지고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서 늘 신기하다.


해외를 나갈 때마다 스타벅스 컵을 소중한 보물처럼 가지고 돌아오는 친구도 신기했다. 벽면을 장식한 컵을 보면서 여행의 추억을 떠올린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납득했다. 물건은 추억을 품고 있다. 음악이 지난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라면 물건은 지난 시절을 고스란히 담은 타임캡슐이다.


그때의 분위기와 기분 그리고 풍경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손에 넣기 위해 고군분투한 노력과 획득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야기가 되어 수집한 물건 속에 잠들어있다. 수집은 삶을 기록하는 제법 멋진 방식이다.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 둘 모으다 보면 자연스레 애착이 생긴다.


물건에 대한 애착은 수집욕구와 만나 더욱 깊어진다. 소중하게 모은 컬렉션은 그 자체로 자신만의 귀중한 자산이자 본인의 일부와 같다. 수집하면서 들인 노력과 추억들이 기분 좋은 경험으로 남는다. 삶은 결국 경험의 총합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수록 남들과는 다른 자기 색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수집은 가장 본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일종의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수집하는 물건을 통해서 사람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정말 잘했던 친구 하나는 일제 하이테크 펜을 열심히 수집했다.


당시 3000원 가까이했던 하이테크펜은 학생들 사이에서 필기구의 명품으로 인정받는 물건이었다. 용돈을 받을 때마다 하나씩 샀다는 펜은 하이테크 전용 필통에 가득 들어있었다. 그 친구는 어디를 가든 그 필통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정작 수업시간에 하이테크 펜으로 필기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펜은 그에게 소중한 컬렉션이었고 자신의 일부와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통을 통째로 잃어버리자 친구는 일주일 내내 우울한 얼굴을 달고 다녔다. 나중에 성인이 돼서 다시 그 친구를 만날 일이 있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친구와 나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펜을 수집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친구는 웃으면서 중학교 이후로 펜을 사모으는 일은 그만뒀다고 말했다. 하이테크펜을 수집했던 이유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펜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공부보다 더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말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과거의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는 애착을 가졌던 것들을 통해서 돌아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머릿속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과 내가 가진 물건에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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