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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02. 2023

글은 그냥 쓰면 된다

살면서 겪은 체험과 경험은 모두 이야기가 된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은 365일 중에 단 하루도 없다. 원하는 대로 멋진 문장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정말 드물다. 대체로 글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받은 영감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만들어진다. 문장의 배열과 문맥의 순서도 처음에는 뒤죽박죽 섞여있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손가락이 흘러가는 대로 쓰다 보면 뭐가 나오긴 나온다. 레고조각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조금씩 맞춰가다 보면 형태가 만들어진다. 글도 그렇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과 단어를 연결해나가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큰 그림이 드러날 때가 많다. 마음에 드는 깔끔한 모양은 애초에 나오지 않는다. 여러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면서 답을 찾는 작업이 창작이다.


 마음을 비워야 된다는 무협지의 흔한 대사처럼 글을 잘 써야겠다는 욕망을 버리면 글이 나오기 시작한다. 좋은 글을 쓴다는 강박을 버리면 글이 될만한 조각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애초에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욕심이다. 멋진 작품을 만들겠다는 소망은 순수하지만 현실은 변수가 많다. 일단 나는 좋은 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글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쓰는 사람은 그저 생각하고 느낀 바를 표현하는 것이 전부다. 물론 좋은 의미나 인생의 깨달음을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글쓰기는 작가의 입장과 읽는 독자의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글도 없고 모두에게 환영받는 좋은 글은 쓸 수도 없다. 솔직하게 기록하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 내가 쓰는 행위에 갖는 의미는 오로지 이게 전부다.


 과거에는 좋은 글이 가져야 할 조건과 의미 있는 메시지에 집착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쓰면서 즐겁지도 않았고 완성하고 나서도 반응이나 사람들의 시선이 늘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글은 내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읽는 사람들의 것이다. 소유권이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지만 향유하고 즐기는 것은 독자의 권리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느끼는 감상은 독자의 경험이다. 쓰는 자유보다 읽고 감상하는 자유가 넓은 의미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좋은 글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잘 썼다고 생각해도 독자의 느낌은 다를 수도 있다. 반대로 나는 별생각 없이 썼지만 글을 통해 위로받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읽는 사람의 입장은 내 역량 밖의 영역이므로 쓰면서 강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쓰는 행위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공원에서 책을 읽다가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좋은 소재를 발견하기도 한다. 친구와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할 때도 있고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글로 기록하기도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글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핸드폰을 꺼내 메모한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몇 줄의 메모에서 시작된다. 매일 매 순간이 창작의 원천이 되는 기쁨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것이다.


 강박은 자신을 속박하는 아주 단단한 관념의 사슬이다. 다른 누구도 대신 풀어줄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풀고 나와야 한다. 강박에 시달리던 시절의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려웠다. 몇 년 전 항상 동경했던 국내 유명 출판사에서 내게 출간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형출판사였다. 책을 좋아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출판사의 책을 즐겨 읽었다. 출간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동아줄과 같았던 제안은 몇 달 후에 일방적으로 전면백지화되었다. 그때 느낀 좌절감은 아주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꿈이 코앞에서 무너질 때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에 직면한다. 문제의 원인을 찾다 찾다 결국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는 것이다. 내 글과 그림의 완성도가 문제라는 생각에 빠지자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한 회의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나는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적어도 몇 달을 글 쓰는 일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때의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보란 듯이 국내 최고의 출판사에서 내 이름 석 자가 들어간 책을 써서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사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내 책을 만나보고 싶었다. 큰돈을 벌거나 유명한 작가가 되려는 욕망도 없었다. 내가 평생 동경했던 출판사에서 작가로 인정받고 책을 내는 것이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출판사의 태도가 분했지만 분노보다 좌절감이 컸다. 그러나 모든 의지를 다 잃었다는 감정도 결국 기분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두고 잘만 흘러갔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용기를 잃었던 순간 역설적으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글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좌절감과 모멸감 바닥까지 떨어진 패배감 역시 다시없을 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 내면의 지형도를 세밀하게 그려가며 천천히 감정을 기록해 나갔다. 삶이 그 순간 이후로 급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는 한 가지는 확실하게 배웠다. 기록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은 다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글을 쓰는데 필요한 재능이나 역량에 대해서  생각이 없다. 생각을 입으로 전달하면 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  뿐이다. 글은 그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의사소통의 방법일 뿐이다.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문학의 신성함을 내세워서 신격화하는 부류도 존중한다. 다만 나는 글을 그저 생각하고 느낀 것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본다. 글쓰기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평가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쉬듯 말하고  먹듯 글을 쓰고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부여받은 사고와 표현의 자유를 실컷 누리면서 살다 가면 된다.

 

 삶은 객관식처럼 보이는 주관식이다. 어차피 정답을 아는 사람도 없고 애초에 답은 늘 모습을 바꾸면서 장난을 친다. 애초에 문제를 내는 출제자도 없다. 인생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고심하는 인간은 그래서 피곤한 존재다. 생각은 폭넓게 해야 하지만 고민은 줄일수록 좋다. 문학은 고민하는 순간 지루해진다. 복잡한 단어와 어려운 표현을 써가며 인생의 진리나 철학을 운운하는 글은 쓰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런 소설이나 에세이는 이 세상에 널렸다. 나는 그저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평범함에 만족한다. 예술을 지향하면서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지 않다. 흔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사람답게 사는 것이 예술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은 없다. 그러나 글이 안 써지는 날도 없다. 하루 24시간은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법이 없다. 느끼고 생각한 것들은 다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그 흔적 속에서 글이 될 만한 것들을 발굴해 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통해서 글을 쓸 수 있고 생활 속에서 언제나 창작의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공부에 왕도가 없는 것처럼 글쓰기에도 정답이 없다. 본인의 삶이 나의 글쓰기 스승이 된다. 살아온 나의 인생이 앞으로 살아갈 나의 내일이 내 글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살면서 겪은 체험과 경험은 모두 스토리가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이란 어디에도 없다. 특별하지 않은 삶이라도 글이 되는 순간 특별해진다. 삶이 품고 있는 기승전결은 누구에게나 늘 흥미진진한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 살 것이다. 내가 남긴 흔적과 앞으로 남길 발자취 속에서 글을 발굴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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