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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12. 2023

안경과 나

살아온 시간이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안경을 써왔다. 내년이면 안경을 쓴 지 20년째다. 이만하면 내 신체의 일부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사실상 제2의 눈이나 다름없다. 노인이 되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안경을 쓸 것 같다. 안경을 쓰면서 큰 불편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라식이나 라섹 같은 시력교정술을 하면서 하나 둘 안경을 벗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라식과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벗는 라식수술은 일종의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미용목적으로 안경대신 렌즈를 끼는 친구들 역시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뿔테안경을 벗지 않았다.


 워낙 안경을 오래 쓰다 보니 불편하다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원래 불편함이란 적응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법이다. 라식을 한 주변 사람들의 열렬한 간증을 들으면서도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다. 어차피 40대를 넘어가면 누구에게나 노안이 찾아온다. 지금 시정교정수술을 해봐야 10년 후에는 노안용 안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미 20년간 안경을 썼는데 이제 와서 라식 수술을 하는 것은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좋은 눈을 타고 나도 결국 노화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게 안경을 써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냥 쭉 안경을 쓰고 살면 된다. 게다가 나안시력이 나쁜 편이 아니라 수술까지 해가면서 안경을 벗을 필요도 없다.


 내게는 라식수술을 할 만큼 안경을 벗고 싶은 강한 동기가 없다. 반대로 안경을 쓰면서 얻는 큰 이점은 하나 있다. 나는 짝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오른쪽 눈이 조금 더 작은데 쌍꺼풀은 왼쪽 눈에 있어서 한눈에 봐도 차이가 보인다. 눈의 생김새도 옆으로 긴 편인 데다 눈꼬리와 속눈썹도 길다 보니 더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안경을 착용하면 짝눈이 주는 강한 이미지를 상쇄할 수 있다. 그래서 아세테이트로 만든 볼드한 느낌의 뿔테안경을 착용했다. 안경을 쓰면 인상이 좀 더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집에서는 주로 가벼운 티타늄 소재의 안경을 쓴다.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거나 운동을 갈 때도 착용하는데 뿔테에 비하면 좀 더 차가운 인상을 준다. 금속 소재의 안경은 단정한 이미지를 만들어주지만 얇고 가는 디자인에서 오는 무뚝뚝함이 있다. 특히 선이 가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 쓰면 냉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두꺼운 아세테이트 시트로 만든 뿔테안경은 둥글둥글한 느낌을 준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 답답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안경도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피부톤이나 얼굴형보다 전반적인 사람의 분위기와 인상이 더 큰 역할을 한다.


 클라크 켄트는 안경을 벗으면 슈퍼맨이 된다. 반대로 안경을 쓰면 클라크 켄트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영화에서 봤던 슈퍼맨의 변신장면이다. 안경을 쓰고 벗는 것뿐인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한 번씩 안경을 바꿀 때면 변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달라진 것은 안경뿐이지만 뭔가 마음가짐까지 이전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만 아는 작은 변화였다. 안경을 쓰지 않는 주변 사람들은 알아차릴 수 없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오랫동안 뿔테 안경을 쭉 쓰다가 금속테로 바꾼 적이 있다. 날카로운 인상을 줄 것 같아서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잘 어울린다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 동안 안경을 쓰고 다녔으므로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금속테 안경을 잘 착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뿔테를 찾게 됐다. 가을전어 냄새 맡고 돌아온 며느리처럼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미니멀한 스타일의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안경을 바꾸고 싶어 졌던 것이다. 후드티나 편한 스웻셔츠를 자주 입다 보니 금속테보다 뿔테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뿔테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적당히 후줄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낼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요즘은 뿔테안경을 쓰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교복처럼 검은색 뿔테를 쓰고 다녔다. 지금은 그런 풍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녀도 같은 안경을 쓴 사람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 안경도 유행을 탄다. 주기도 빠르고 변화도 다채로운 편이다. 참신한 디자인을 내세운 안경브랜드가 많아졌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결국 사람들은 정체성을 찾아간다. 다양성이 확보되고 나면 각자의 취향이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나는 레트로한 무드가 가득한 안경을 좋아한다.


 지금 착용하는 안경 역시 1960년대 유행했던 디자인을 복각한 모델이다. 투명한 소재의 회색빛 아세테이트가 매력적이다. 확실히 금속테에 비해 무겁고 불편하지만 뿔테가 주는 매력이 있다. 늘 안경을 쓰고 살다 보니 이제 나조차 맨얼굴이 어색하다. 안경 없이 찍은 주민등록증을 사진을 가끔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든다. 20년 넘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사실상 안경을 쓴 얼굴이 내 본모습처럼 느껴진다. 살아온 시간이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안경을 쓰지 않은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오랫동안 사용한 물건은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든 물건은 살아온 시간을 보여주는 작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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