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털어내고 새로움을 맞이하는 마음
겨울의 시작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일 년 내내 멀쩡하던 수도계량기는 하룻밤 사이 맥없이 터져나갔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 탓에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종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사전예고 없이 마치 통보하듯 파고든 겨울의 기세에 서울 아침 기온이 영하 17도를 기록한 날. 굵은 털실로 짠 머플러를 목에 빈틈없이 감으면서 나는 생각보다 봄이 빨리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제멋대로 시작된 겨울처럼 따스한 봄날도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리고 유난히 햇살이 따스했던 2월 말의 어느 오후. 골목길 담벼락 위로 뻗은 나뭇가지 끝에서 나는 작게 피어오른 봄을 만났다. 바람은 여전히 차고 여기저기에 녹다만 눈들이 쌓여있었지만 마른 가지 사이로 막 올라오기 시작한 꽃눈은 엄연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기온이 겨울과 봄 사이 밀고 당기기를 하는 동안 부풀었을 꽃눈. 이 또렷한 봄의 신호를 시작으로 겨울의 그늘 아래 마주쳤던 익숙한 풍경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늦은 밤 창문을 사납게 흔들던 바람은 고요하게 잦아들었고 얼어붙은 손 끝을 녹이던 새하얀 입김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내리는 함박눈 대신 흙냄새를 말아 올리는 봄비가 내렸고 큰 일교차에도 불구하고 공원의 가로수들은 하나같이 모두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다. 나는 두꺼운 코트 대신 니트와 가디건을 더 자주 입기 시작했고 겨우내 둘렀던 머플러는 세탁기 속으로 들어가 묵은 때와 시간을 털어냈다. 옷장에 걸려있던 겨울옷들을 세탁소에 맡기고 돌아오는 오후의 날씨는 정말 따뜻했다.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캔 커피 대신 차가운 콜라를 사서 마시면서 천천히 동네 구석구석 을 돌아보며 걸었다. 산책하기 참 좋은 날씨였다.
하얀 눈이 쌓여있던 긴 겨울의 풍경이 모두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다. 바짝 말라있던 가지는 어두운 잿빛에서 물기를 품은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화려하게 봄을 털어내고 남은 계절을 외롭게 버티던 벚나무들은 벌써부터 겹겹의 꽃봉오리들을 한가득 품고 서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긴 터널 같은 찬 겨울을 지나 눈부신 봄의 문턱에 걸음을 내딛었다 . 계절 지난 옷을 벗어버리듯 지난 겨울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이제 털어버리기로 한다. 잊는다거나 지운다는 표현을 굳이 쓰고 싶지는 않다. 계절이 넘어가듯 시간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용하게 지나간다는 표현을 붙이고 싶다.
사람을 떠나보내고 간절히 바라던 일은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좋다. 봄이니까. 햇살을 받으며 서있는 나무들을 보며 생각한다. 무성하게 달려있던 이파리들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나무들은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풍성한 그늘을 만들던 푸른 잎들이 사라지고 난 빈 가지.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 위 햇살이 닿는 자리마다 작은 새순이 돋아 있다. 비움이 채움으로 가는 하나뿐인 길이란 사실을 봄에게서 배운다.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고 한낮의 햇살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면 개나리, 벚꽃, 진달래, 철쭉 그리고 이름 모르는 작고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날 것이다. 그러면 늘 그랬듯이 꽃을 닮은 고운 마음을 품고 봄날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와 봄날의 거리를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이다.
제멋대로 시작되는 계절처럼 뜻하지 않은 일들로 상심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긴 겨울동안 오르락내리락 하던 감정의 기복을 붙잡느라 많이 지치고 또 외로웠다. 하지만 늘 그랬다. 계절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고 관계는 간절한 대화가 무색하게 정리된다. 그럼에도 또 다시 봄을 기다리듯 끝내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것은 행복이나 기쁨도 계절처럼 제멋대로 찾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세고 있자니 앞으로 성취하게 될 많은 것들이 더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