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사러 집 앞 마트에 들렀다. 오랜만에 연두부와 가지를 사고 천천히 매장을 돌아보는데 라면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라면들 사이로 불닭볶음면이 종류 별로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포장지에 조리된 라면사진만 봐도 땀이 날 것 같았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내게 매운 라면은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불닭볶음면을 처음 먹었을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겨우 반젓가락 먹고 우유를 거의 세 컵 가까이 마셨다. 불닭볶음면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대표적인 한국 음식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코로나 이후 불황이 시작되면서 세계적인 매운맛의 열풍이 시작된 것 같다.
북미와 유럽 그리고 남미에 이르기까지 한국 라면은 매운맛의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나처럼 매운 음식을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은 유행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다. 시도해 볼 생각조차 없다. 과장 조금 보태서 거의 매주 매운맛을 강조한 새로운 음식들이 등장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은 멈출 줄 모른다. 매운 라면과 떡볶이를 넘어서 매운 햄버거, 샌드위치, 햄과 핫도그까지 출시됐다. 원래 매콤했던 음식들은 더 강한 매운맛을 달고 업그레이드되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매운맛의 기준점 자체가 크게 올라갔다. 프랜차이즈 음식들을 먹다 보면 매운맛의 상향평준화를 실감하게 된다.
대형마트에서 판매 중인 가공식품류도 마찬가지다. 전반적으로 매운맛이 몇 단계는 더 올라갔다. 라면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욱 심한 편이다. 기존에 출시된 매운 라면은 이제 맵다는 말을 달기 어려울 정도다. 2,3배 더 매운맛을 강화한 신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다. 맵기의 기준점은 계속해서 더 상승하고 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의 라면들마저 매운맛을 강조한 신메뉴를 연일 선보이고 있다. 매운 음식을 선호하지 않았던 문화권에서도 매운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인 매운맛 신드롬은 불황으로 인해 촉발된 것 같다.
불경기일수록 사람들은 매운맛을 찾는다. 저렴한 돈으로 즉각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매운맛은 통각이다. 뇌에서 강한 통각을 인지하면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데 이때 상쾌함도 함께 느끼게 된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은 이 상쾌함과 개운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매운맛은 근본적으로 강한 자극을 동반한다. 자극에 길들여지면 더 큰 자극을 찾게 된다. 매운맛이 주는 고통에 적응하게 되면 통증은 자극적인 유희가 된다. 매운맛을 즐긴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매운 음식들은 짠맛과 궁합이 좋다. 라면이나 치킨 그리고 시즈닝을 첨가한 육가공품이 매운 음식의 대명사로 꼽힌다. 기름진 데다 짜고 매운맛이 주는 자극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매운맛은 유난히 술과 궁합이 좋다. 간식으로 먹어도 손색이 없지만 술 한잔을 곁들이면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매운 갈비찜과 불닭발은 소주의 좋은 친구가 된다. 매콤한 양념으로 불맛을 더한 치킨은 맥주를 부른다. 알코올과 엔도르핀이 만드는 시너지는 사람들의 애정을 듬뿍 받을 만하다. 나는 매운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하지만 한 번씩 시도는 해본다. 글을 쓰다 말고 마트에 가서 불닭볶음면을 사 왔다. 액상수프를 1/4만 넣어서 비볐는데도 코가 맵다. 핫 젓가락 먹자마자 혀가 아리고 따가웠다. 물을 마셔가면서 겨우겨우 먹었다. 욱신거리는 입 안을 달래기 위해 식빵을 꺼내서 우적우적 씹었다.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역시 매운맛은 무리다.
밥을 먹으러 가면 주문할 때 맵기가 어느 정도인지 꼭 확인하는 편이다. 내가 생각하는 매운맛의 기준이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신라면 정도의 맵기가 내가 먹을 수 있는 안정적인 매운맛이다. 김치볶음밥이나 제육볶음을 시켜도 매울 때가 있다. 경험이 누적되다 보니 빨간 음식은 늘 확인하고 주문하게 된다. 조금 덜 매운맛이라면 매콤한 풍미를 즐기면서 먹을 수 있는데 아쉽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나 같은 한국인은 주문할 때 늘 고민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변하고 취향도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매운맛은 여전히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강렬한 매운맛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통각에 불과하다. 신라면만 먹어도 입 안이 살짝 얼얼한 나에게 한국인의 매운맛은 아주 먼 이야기다. 불닭볶음면을 먹으면서 매운맛에 관한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 부산의 친척집에 놀러 가서 빨간 어묵을 처음 먹었던 기억이다. 새빨간 어묵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뱉어버렸다. 대학생 시절 집 앞에 매운 닭꼬치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사 먹었는데 한 입 먹고 저녁까지 배가 아팠다. 매운 음식과 엮여서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말하는 맛있게 맵다는 말을 나는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유난히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이 있다면 나처럼 입에 대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 가장 매운맛으로 조리한 엽떡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먹는 친구를 본 적 있다. 세상에는 나와 정반대인 사람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입은 거짓말을 해도 입맛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입보다 입맛이 훨씬 더 정직한 편이다. 자신은 속여도 자기 입맛을 속이기는 어렵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솔직한 것은 어쩌면 양심보다 입맛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