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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1. 2023

와이드와 슬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돌아다닐 때면 사람들이 입고 있는 바지를 보게 된다. 올해도 여전히 넉넉한 루즈핏의 바지가 인기다. 힙합바지라고 불렸던 넉넉한 길이감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패션은 확실히 돌고 돈다. 바지의 스타일은 보통 10년에서 20년 주기를 반복한다. 유행이 한 번 돌아오면 새로운 스타일이 나타나기 전까지 쭉 지속된다. 활동성과 편의성을 갖춘 에슬레저 룩이 코로나 시기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상의를 넉넉하게 입으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의도 여유로운 핏을 선호하게 됐다. 면바지부터 청바지까지 와이드핏은 여전히 사랑받는 중이다. 슬림핏을 향한 수요는 아직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사처럼 패션도 반복된다. 시대만 달라질 뿐 바지 스타일은 슬림과 와이드 두 가지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신발이 덮일 정도로 치렁치렁한 통 넓은 바지가 인기를 끌었다. 힙합과 스케이드보드에서 영감을 얻은 스트릿 패션의 영향이 컸다. 오버사이즈 스타일에 나이키 SB 덩크나 보드화를 신은 1,20대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베이프와 패럴윌리엄스의 BBC까지 주목을 받으면서 스트릿룩의 인기는 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에디슬리먼이 등장했다. 삐쩍 마른 남자들이 딱 달라붙는 슈트를 입고 나온 디올옴므가 세계를 휩쓸어버렸다. 그렇게 2007년을 기점으로 스키니 진이 등장했다. 80년대 디스코무드가 테크토닉으로 재해석되면서 하이탑 슈즈까지 함께 돌아왔다.


 슬림핏 바지 스타일이 득세하면서 와이드핏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스트릿패션에 대한 열기는 이전 같지 않았다. 다들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고 다녔다. 주말 저녁의 홍대나 강남 일대는 스키니진에 하이탑 슈즈를 신은 남자들이 가득했다. 슬림핏 바지의 인기는 계절을 초월했다. 여름에는 루즈핏 티셔츠에 스키니진을 입었고 겨울이 되면 상의만 코트로 바뀌는 수준이었다. 소녀시대가 Gee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였던 스키니컬러팬츠가 슬림핏 유행의 정점이었다. 물론 과도기도 존재했다. 부츠컷은 와이드와 슬림 사이의 점이지대 역할을 했던 스타일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 명백을 이어나갔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연예인들이 입으면서 입소문을 탔던 트루릴리젼이 부츠컷 유행의 끝을 장식했다.


 패션과 역사의 공통점은 반복과 혼란이다. 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스타일은 왕좌에 올라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오게 된다. 영원한 권력이 없는 것처럼 유행은 끝이 정해져 있다. SPA패션의 등장은 트렌드에 다양성을 불어넣었다. 유행의 주기가 짧아지면서 여러 가지 스타일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몇 년씩 지속되는 유행은 이때를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다. 트렌드는 달마다 바뀌었고 다양한 스타일을 믹스매치한 스트릿패션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SNS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각양각색의 스타일을 만나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남다른 센스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SNS에서 셀럽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더 이상 슬림과 와이드를 두고 유행을 논하지 않게 되었다. 유행보다 스타일링이 더 크게 주목받았다.


 학생들의 교복스타일이 변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교복바지 기장을 줄이거나 통을 크게 늘리는 튜닝문화는 대부분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교복바지를 가지고 온갖 실험을 하던 괴상한 악습은 자취를 감췄다. 아직까지 슬림핏을 주류로 인정하는 곳은 남성패션 분야다. 갤럭시나 캠브리지멤버스 같은 정통 남성정장 브랜드는 여전히 슬림핏의 슈트를 생산한다. 커스텀멜로우 같은 컨템퍼러리 브랜드 역시 슬림핏의 셋업슈트를 선보이고 있다. 맞춤정장 업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고객의 체형을 고려하기보다 몸에 착 붙는 슬림핏을 우선시한다. 체촌만 하고 공장에서 찍어내는 이름만 맞춤정장인 곳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남성복 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오피스룩이다. 한국은 단정하면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오피스룩을 선호하므로 슬림핏이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와이드핏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도 슬림핏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숄더패드가 들어간 연극적인 무드의 슈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솔직히 버블경제시기의 일본비즈니스맨과 레이건시대의 뉴욕 월스트리트 스타일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물론 패션은 역사처럼 반복되므로 2030년대에 한 번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SPA패션과 SNS의 발달이 가져온 스타일의 다양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피스룩 시장도 느리지만 차츰 변화하게 될 것이다. 패션은 물들이거나 물들거나 둘 중 하나다. 변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대가 변하게 만든다.


 레트로 무드가 불러온 고프코어나 Y2K룩이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워크웨어룩 역시 강세다. 힙한 카페나 편집샵 사장님들이 유난히 워크웨어룩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메카지는 캐주얼한 스트릿룩과 섞여서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아마 90년대 시부카지도 재해석돼서 등장하지 않을까? 성수동이 시부카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핏을 보면 패션의 역사가 보인다. 슬림과 와이드를 넘나들면서 스타일은 계속해서 진보했다.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개성과 정체성과 시대성이 어우러지면서 변화를 만들어낸다. 거리를 수놓는 와이드팬츠는 20년 전과 비슷해 보여도 조금씩 차이점 존재한다. 사람들의 스타일이 진보했기 때문이다. 패션은 반복되지만 완전히 똑같은 반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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