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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6. 2023

팬암이 옷을 팔게 된 이유

 수리 맡긴 안경을 찾으러 백화점을 방문했다. 안경점을 지나다 한 매장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파란 로고 속에 들어있는 PAMAM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닿았다. 오래전에 파산한 미국항공사 팬암이 21세기에 의류브랜드로 부활한 것이다. 로고에 들어간 시그니처 컬러를 활용한 옷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라이선스 의류 브랜드가 몇 년 전부터 크게 유행했지만 사라진 브랜드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다. 팬암 매장 근처에 코닥이 보였다. 어패럴이라는 이름만 달면 다 의류브랜드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개인방송플랫폼이 인기를 끌던 시기 사람이나 업체 이름에 TV를 붙이던 모습이 생각났다.


 한국의 라이선스 브랜드는 일시적인 트렌드를 넘어서 이제 확실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MLB가 의류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라이선스 브랜드의 시대가 열렸다. 후발주자였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가 실패했다면 열풍은 주춤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두 브랜드의 롱패딩이 폭발적인 매출을 기록하면서 라이선스 브랜드는 잘 팔린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온갖 브랜드가 옷을 팔기 시작했다. 라이선스 브랜드의 핵심은 대중성이다. 패션산업과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다. 사람들이 잘 아는 브랜드면 아무 문제없다. NBA나 NFL 같은 스포츠 리그나 미국 방송국 CNN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 좋은 예시다.


 도산해서 사라진 팬암이나 폐간된 미국의 잡지사 라이프의 상표권을 붙인 것을 보면 라이선스의 한계는 없다. 필름카메라를 애용했던 나로서는 코닥어패럴을 보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경영난을 타계하려는 신사업 진출 알았지만 실상은 한국 의류업체의 라이선스 사업이었다. 해외 명문대학교의 이름을 가져와서 찍어낸 옷이 잘 팔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세상이 변했다. YALE 로고가 들어간 맨투맨이나 후드를 거리에서 이렇게 쉽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단순히 라이선스 브랜드가 난립해서 사람들이 많이 입게 된 것은 아니다. 공급이 많아도 수요가 없다면 패션은 외면받는다. 트렌드를 넘어서 장르로 자리 잡는 패션은 높은 수요를 기반으로 갖고 있다.


 사람들이 라이선스 브랜드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무난함에 있다. 라이선스 브랜드의 디자인 콘셉트는 대동소이하다. 거의 똑같다고 봐도 별차이가 없다. 애초에 브랜드 헤리티지를 내세우지 않는다. 의류브랜드가 아니므로 내세울 것도 없다. 오트쿠튀르의 장인정신이나 디자이너 브랜드 특유의 재기 발랄한 영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을 분석해서 10,20대 입맛에 맞는 옷을 찍어내면 된다. 주요 고객층은 1,20대 학생들이다. 기본템은 유니클로나 무신사 스탠다드를 이용하면 되고 그냥 편하게 입는 옷으로 라이선스 브랜드를 선택하는 것이다. 디자인에 트렌드도 적당히 섞여있고 세일기간에 구매하면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한국인들은 무난함을 정말 사랑한다. 개성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무난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크다. 무난하면서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감각 있는 디자인까지 뽐낼 수 있다면 완벽하다. 그런 점에서 라이선스 브랜드는 한국인의 취향에 최적화된 의류브랜드다. 앞서 말했듯이 라이선스 브랜드 의류는 디자인의 고유한 특성이 없다. 로고만 떼다 서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브랜드 간의 스타일이 유사하다. 겨울이 되면 로고만 다른 푸퍼 패딩을 출시하고 거의 똑같은 핏의 티셔츠와 바지를 계절 별로 내놓는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시즌에 맞는 트렌드를 가미해서 유행을 따라간다. 라이선스 브랜드는 한국인의 취향과 시장선호도를 기반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라이선스 브랜드는 최적화에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패션브랜드가 성장하려면 브랜드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다년간의 투자와 마케팅이 필요하고 고유한 디자인과 스타일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자본도 상당하다. 기업 입장에서 독보적인 자기 색깔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진부하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시장에서 곧바로 도태된다. 수많은 브랜드가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살아남은 브랜드는 지위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지출을 감내해야 한다. 라이선스 브랜드는 이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한다. 비용을 지불하고 대중적으로 익숙한 브랜드 이미지를 차용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디자인트렌드를 분석해서 저가로 옷을 대량생산한다. 유행에 편승하고 이름값에 기대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큰 나무 아래 자라는 꽃은 그늘 속에서 장대비와 땡볕을 피한다. 생존을 위한 최적화된 전략이다.


 동종업계에 비슷한 라이선스 브랜드들이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큰 호재다. 같은 성격의 브랜드가 난립하게 되면 시장 자체가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게 된다. 순대타운이나 전자상가와 비슷하다. 소비자는 여러 브랜드에서 일제히 내놓는 상품이 유행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잘 팔리는 제품이 나오면 발 빠르게 서로 카피한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다는 말처럼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이유 없는 성공은 없다.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비즈니스는 성과로 증명하는 것이다. 라이선스 브랜드들은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나서 특성을 살린 아이템들을 하나씩 내놓고 있다. 카피도 성공하면 예술이 된다. 그리고 예술이 전략을 만나면 비즈니스가 된다. 라이선스 브랜드는 대중문화를 패러디했던 키치와 팝아트와 닮았다. 소비도 문화다. 시대에 따라 주목받는 예술이 변해온 것처럼 소비문화도 새롭게 변화했다고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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