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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29. 2023

굿바이 닥터마틴

 좋은 브랜드의 기준은 대체 불가능한 매력의 유무로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닥터마틴은 충분히 좋은 브랜드다. 다른 신발 브랜드가 대신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캐주얼과 클래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확립한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90년대 시부카지 붐을 타고 트렌드의 선두에 섰던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는 여전하다. 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브랜드는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으로 대접받는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아이템은 아이콘이 된다. 바버 왁스재킷이나 버버리 트렌치코트처럼 닥터마틴 역시 앞으로 몇십 년이 흘러도 존재감을 잃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닥터마틴을 나는 신을 수 없다.


 부츠와 구두를 신으면 늘 발이 아프다. 1시간이 넘어가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발이 괴로우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곳에 가도 집이 그리워진다. 그런 점에서 스니커즈는 나에게 벗어날  없는 숙명과 같다. 운동화 없는 삶은 상상조차   없다. 단화도 신으면 불편하기는 매한가지다. 컨버스 척테일러나 아디다스의 독일군은 2시간 이상 신으면 슬슬 힘들다. 언제나 멋보다 몸이 먼저다. 신발은 얼마든지 포기할  있다. 불편한 신발은 아무리 예뻐도 사랑할  없다. 이런 나와 반대로 친한 친구는 닥터마틴 애호가다. 10 가까이 신은 닥터마틴을 여러 켤레 갖고 있다. 그리고 거의 매년 닥터마틴을 구입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친구는 닥터마틴을 구입했다. 펜톤과 아드리안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아드리안을 선택했다. 발등이 높은 나는 도저히 신을 수 없는 모델이다. 한국에서 단종된 켈빈이나 아키도 발등이 낮았다. 둘 다 실루엣이 정말 멋진 구두였지만 안타깝게도 내 발에 맞지 않았다. 연말 특가세일을 통해서 반값 이하로 사서 기뻐했다가 발을 넣자마자 반품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자주 신다 보면 발 모양에 맞게 신발이 늘어난다고 했지만 고통은 사양한다. 좋아하는 신발이 불편해도 꾹 참고 신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나처럼 질색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신발장에서 미련과 함께 남아있던 닥터마틴 두 켤레를 꺼냈다. 거의 신을 일 없는 신발이었지만 예뻐서 쭉 갖고 있었다. 발볼이 넓고 발등이 높은 전형적인 동양인 족형을 가진 내게 닥터마틴은 그림의 떡과 같다. 사이즈는 270을 신으면 잘 맞았지만 신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비명을 질렀다. 한 사이즈 업해서 샀던 닥터마틴 모노도 마찬가지로 괴로웠다. 길들여보겠다고 슈트리를 넣어봤지만 별 소용없었다. 신발이나 내 발모양이 문제는 아니었다. 아픔을 감수하고 신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발이 불편하면 맘이 불안하고 장이 불편하면 삶이 불행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닥터마틴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애증이다. 예뻐서 샀다가 아파서 반품하고 그러다 다시 눈에 들어오면 손이 가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다른 브랜드로 대체할 수 없는 정체성과 매력이 있지만 내게 맞지 않는 신발. 닥터마틴은 손에 넣어도 결국 소유할 수 없는 신발이다. 이제 완전히 놓아줄 때가 됐다. 가까이 두고 싶지만 멀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당근 앱을 눌렀다. 슈박스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단테는 조만간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발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편한 운동화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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