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브리프케이스를 당근했다. 이태리 피렌체 공방에서 만든 더브릿지 제품이었다. 정말 멋진 가방이지만 들고 다닐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슈트를 주로 입는 스타일에서 멀어지다 보니 클래식한 브리프케이스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나보다 더 멋지게 사용해 줄 사람을 위해서 저렴한 가격에 당근 했다. 구매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을 낸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더블몽크스트랩 구두에 더블브레스티드 슈트를 입고 있는 것만 봐도 클래식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 티가 났다. 기쁜 마음으로 가방을 판매했다. 옷이나 가방 그리고 신발은 확실히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스웻셔츠나 후드티를 자주 입으면서 범백이나 백팩을 애용하게 됐다. 공적인 자리에는 필슨을 들고 다니면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가죽소재의 브리프케이스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스타일의 변화였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실용성 때문이었다. 가죽소재의 브리프케이스는 수납공간이 협소한 편이다. 노트북이나 태블릿 같은 전자기기를 넣기 불편했다. 클래식무드가 강한 브랜드의 가방일수록 실용성을 배제하는 편이다. 자주 들고 다녔던 에팅거의 브리프케이스가 딱 그런 물건이었다. 브라이들 레더 소재라 무겁기만 하고 책 몇 권 넣으면 가방이 불룩해져 버렸다. 브리프케이스는 내게 예쁜 짐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눈이나 비를 맞으면 가죽이 상할 수 있으므로 가방 속에 늘 방수커버를 넣고 다녔다. 들고나갈 때마다 흠집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가죽의 특성에 맞는 관리까지 필요했다. 더브릿지 가방은 베지터블레더였지만 에팅거는 브라이들레더였다. 소재는 둘 다 같은 소가죽이지만 가공방법의 차이로 관리법이 달랐다. 브라이들레더는 전용크림을 따로 사용해야 했다. 가죽크림으로 가방을 손질할 때면 물건이 아니라 상전을 모시는 느낌이 들었다. 멋이 아니라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주객전도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 가방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슈트를 즐겨 입으면서 열심히 수집했던 내 브리프케이스 컬렉션을 하나씩 정리했다. 가방 12점을 모두 판매하는데 2년이 넘게 걸렸다. 텅 빈 옷장을 보고 있는 데 가슴이 후련했다. 밀린 숙제를 끝낸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꼭 필요한 물건은 없다. 없어도 생활하는데 별 지장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옷이나 신발 그리고 가방을 살 때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물건을 살 때마다 짜릿함과 성취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물건을 얻기 전까지의 과정이 제일 즐거웠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희열은 정말 큰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막상 사용하면서 얻는 만족감은 금세 사라진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가방이 아니라 가방을 손에 넣는 과정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왁스캔버스와 나일론 소재의 필슨 브리프케이스 둘만 남기고 모든 가방을 처분했다. 10년 넘게 사용한 낡은 필슨 가방이 살아남은 이유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들고 다니면서 비에 젖을까 흠집이 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 마음이 편해야 좋은 물건이다. 망가지고 상처 날까 봐 사용하면서 마음이 불편한 패션아이템은 진짜 내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심미성보다 중요한 것이 편의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뻐도 불편하면 탈락이다. 아무리 멋있어도 손이 많이 가면 실격이다. 눈보다 마음이 편해야 한다. 눈이 아니라 마음이 편해야 오래 곁에 두고 쓸 수 있다. 좋은 옷과 좋은 물건의 기준은 결국 마음이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