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립글로스

by 김태민

겨울이 되면 늘 입술이 튼다. 립밤을 바르는 것을 자주 까먹는다. 세로로 갈라진 주름 사이로 하얗게 피부가 일어났다. 입술의 외곽선 밖으로 말려 나온 끄트머리를 잡아서 뜯었다. 손톱에 붙은 표피는 바싹 마른 모래색이다. 책상에 굴러다니는 버츠비 립글로스를 두껍게 발랐다. 그레이프후르츠 향이라고 쓰여있지만 과일보다 세제 냄새에 가깝다. 겨울마다 립글로스를 자주 구입했다. 하지만 끝까지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가방과 파우치 그리고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립글로스는 시간이 지나면 종적을 감춰버린다.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 알아서 사라진다. 그러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점심때 코트를 당근으로 거래했다. 구매자에게 옷을 건네기 전에 주머니를 살펴봤더니 오래된 니베아 립글로스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인공적인 과일향이 났다. 직접 구매한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선물 받았던 것 같다.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때로는 물건보다 기억이 더 빨리 상하기도 한다. 집안 곳곳에 쓰다만 립밤이나 립글로스가 여러 개 남아있을 것 같다. 수시로 입술에 바르기 위해 옷이나 가방 속에 챙겨 넣은 채 자주 잊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습관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립스틱이나 립밤을 자주 잃어버린다. 작고 휴대하기 편한 물건은 우리 손을 쉽게 떠난다. 칠칠맞고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물건의 숙명인 것 같다. 가장 흔한 분실물은 지갑이나 핸드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일수록 더 쉽게 사라진다.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붙박이장이나 책상 그리고 냉장고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다. 한 군데 가만히 있는 것들이 더 안전하다. 사람도 비슷하다. 가족이 되지 않는 한 사랑은 결말이 하나뿐이다. 상대가 떠나거나 내가 떠나가거나 둘 중 하나다. 목적지가 다르다면 동행은 갈림길 앞에서 끝난다.


심리적인 거리가 너무 가까운 사람들은 때가 되면 다 멀어진다. 정서적인 거리도 제일 가깝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붙어있지만 끝은 늘 이별이다. 몸에 지니고 다녀도 잃어버리는 립글로스처럼 사라진다. 관계를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유통기한이 다 된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고 뚜렷한 원인이 방아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라지기 쉬운 물건의 숙명처럼 인간관계도 끝이 정해져 있는 것뿐이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녀도 잃어버리고 품에 안고 다녀도 잊어버릴 물건처럼. 사라질 사람들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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