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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05. 2024

속도의 지옥

빨리빨리 살다 보면 내면부터 망가진다

 빨리빨리는 한국인의 덕목이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들은 속도에 종속된다. 남의  애들보다 걸음마가 느리고 말하는 시기가 늦으면 난리가 난다. 한글을 떼는 속도가 느리면 부모는 애가 탄다. 또래 아이들보다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면 속에 불이 난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된다는 조바심은 미취학 아동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주변 아이들보다 성장이 더디고 키가 작으면  가족이 걱정을 한다. 성장기 내내 아이들은 느리면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누구나 평균이상을 강제로 지향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남들보다 빠른 사람은  집안의 자랑거리가 된다. SNS 전시된 아이들의 성취는 아이들 본인이 원한 것일까? 아니면 속도에 집착하는 부모가 만든 업적일까?


 입시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가 되면 남들보다 느리다는 말은 죄악으로 취급받는다. 너나   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삶을 강요받으면서 산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괜찮은  알고 살았다. 그러다 결국 문제가 터졌다. 자진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사회는 소수의 선택이라고 치부하며 넘어갔지만 증가세는 줄지 않았다.


 연령과 성별을 막론하고 스스로 삶을 등지는 이들이 폭증했다. 자살률뿐만 아니라 도피와 은둔을 택하면서 세상과 단절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삶과 죽음 어디에도 행복이 없는 시대다.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이다. 위기극복의 DNA 강조하며 빠른 성과와 남다른 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긴 대한민국은  이렇게  것일까?


 비극이 발생한 배경에는 속도에 집착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도피와 은둔을 선택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남들만큼  살지 못해서 가족과 부모에게 폐를 끼쳤다는 부채의식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1인분도 제대로 못하는 잉여인간으로 자신을 비하했다.


 스스로를 가둔 작은 방은 비참한 감옥과 같았다. 누적된 좌절감은 근성이나 열정으로 쉽게 극복할  없다. 배려와 이해 그리고 존중을 찾아볼  없는 차가운 사회의식이 성장제일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의 본모습이다. 문제의 원인을 비판하지 않고 언제나 문제를 가진 사람을 비난한다.


 남들보다  느린 사람도 있고 걸음이 더딜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속도를 강요하면 마음의 상처는 점점  깊어진다. 안타까운 사실은 심리적인 지지대가 되어야  가족이 제일 먼저 상처를 준다. 평균 혹은 평균이상의 성적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구성원에게 살가운 가족은 드물다. 의지할  있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자존감은 붕괴한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학창 시절을 문제없이 보내고 사회생활까지 잘했던 사람들이 직장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있다.  그랬던 것처럼 소수를 이단아로 규정하고 다수를 정상이라고 포장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소수에게 낙인을 찍고 다수를 보전해 왔다. 이제는  얄팍한 수법도  이상 통하지 않는  같다. 잠재적인 위험군의 숫자는 상상이상이다.


  나라의 자랑거리인 ‘빨리빨리 사실 덕목이 아니라 악습이다. 국민성도 아니고 자랑거리도 아니다. 전통은 포장해도 악습을 포장해서는 안된다. 속도에 집착하는 강박은 ‘제때제때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빨리 졸업해서 제때 취업하고 결혼하고 제때  낳고   장만해야 하는 한국인의 과업은 끝이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정답을 강요받는다. 어떤 삶을 살든 사회가 정한 모법답안을 따라야만 사람 취급을 받는다. 패배자와 낙오자를 걸러내기 위해  나라가 애를 쓴다. 중도탈락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러나 제때제때 사는 삶은 정말 완벽한 행복을 누릴  있을까? 사람마다 행복의 유형이 다르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도 얼마든지 불행은 찾아올  있다.


 책임과 의무 때문에 사람들은 힘든 티를 내지도 못한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요하고 훈수 두던 사람들은 위기 상황이 오면 알아서 하라고 선을 긋는다.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빠로서 엄마로서 가장이자 어른으로서 견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참고 살라는 말이 해답이 아닌 것을 누구보다  아는 세대의 입에서 참으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 극심한 공허함이 찾아온다.


 중년의 위기는 탈진이다. 행복을 충전하고 삶을 돌아볼  없이 과업을 수행하다 그로기 상태가 된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 서로를 위로하면서 멋쩍게 웃지만 내면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갱년기와 폐경기 즈음에서 자살률이 치솟는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제때 과업을 달성한 노년세대의 자살률은 세계 1등이다.  소수의 문제인가? 다시 부적응자를 걸러내야 할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적인 지표들은 급상승했다. 그러나 행복지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문제가 터진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문제였지만 모두가 모른 척하고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뿐이다. 경제위기와 불황은 양극화를 부른다. 심리적인 취약점은 먹고살기 힘들어질  폭발하는 뇌관이다. 사회적 취약계층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평가받는 인생이 주는 부담감은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치명타가 된다.


 자살직전에 가까스로 마음을 돌린 사람을 봤다. 2억에 달하는 고액연봉을 받는 능력자 입에서 살아봐야 의미 없다는 말이 나왔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사람들은 사는 것이 지치고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 나약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한계가 있다. 나는 해당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 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신도시의 중심업무지구나 학원가를 보면 심리상담센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속도를 내기 위해 신경정신과 약을 먹어가면서 일하고 공부한다. 끝까지 버티는 쪽이 이긴다는 사회적 통념은 사람들을 여전히 경쟁으로 밀어 넣고 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속도에 길들여지면 마음이 망가지는 속도 역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집착을 한다.


 돈과 명예 그리고 지위와 이미지 같은 것들.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동아줄처럼 붙잡고 간신히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삶이다. 위아래 나눌 것 없이 사방에 위험이 널려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이상으로 쉽게 무너진다. 괜찮은 사람은 없다. 괜찮은 척하고 있거나 자각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다. 속도의 집착이 낳은 광기는 심리적인 위기라는 광풍을 몰고 온다. 모두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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