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끝과 시작

견디다보면 지나가고 버티다보면 끝이 난다

by 김태민

세차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창문을 열고 비가 오는 풍경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는 비는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집 밖 공원의 바짝 마른 흙바닥이 젖으면서 흙먼지 냄새가 올라오다 싱그러운 비 냄새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공원을 빽빽하게 채우고 서있는 나무들 위로 내리는 빗소리가 파도소리처럼 시원했다. 8월의 매서운 땡볕에 제 색깔을 잃었던 나뭇잎들이 가지마다 새파란 빛을 뿜어내는 아침. 먹구름 가득 낀 잿빛 하늘아래 푸른빛에 물들어가는 비오는 날의 풍경이 참 예뻤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는 오후를 기점으로 쏟아져 내리다 늦은 저녁에서야 조금씩 가늘어졌다. 늦은 밤 누워서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며 밤새 소곤거렸던 빗소리는 아침이 되자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나는 집을 나와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고운 입자로 잘게 쪼개진 물방울의 냄새를 한껏 맡았다. 말라있던 가지들은 수분을 흠뻑 머금어 튼튼해진 것처럼 보였고 여름 내내 찾아볼 수 없었던 이끼들은 여기저기에서 확연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름 없는 풀꽃과 나무들은 찌는 듯이 더웠던 긴 여름을 의연하게 견뎌냈다. 손톱보다 작은 이파리를 단 잡초부터 높게 솟은 오래된 관목까지 모두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았다.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들었던 폭염은 맹렬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모습을 감춰버렸고 어김없이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왔다. 열기에 꺾여있던 줄기들은 밝은 빛의 꽃을 달기 위해 모두 고개를 들었고 잠을 설치게 만들던 열대야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끝이 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이었지만 끝은 분명히 있었다. 태어나 수없이 많은 계절을 보낸 우리는 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뜨거운 여름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것을. 봄이 오기 직전의 매서운 꽃샘추위나 한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폭염조차 밀려드는 새로운 계절에 자리를 내주는 것을 보면 힘든 시절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자리만을 겨우 지키는 작은 풀꽃들이 타오르는 여름을 견디고 몰아치는 겨울의 칼바람을 이겨내는 것은 아마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들 역시 계절처럼 결국에는 다 지나간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도 마지막은 존재하고 벗어나기 힘든 굴레처럼 보이던 시련도 시간 앞에 전부 무너진다. 한계에 직면했을 때의 아찔했던 고통은 내면의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아픔의 크기만큼 삶의 면역력도 커진다. 어떤 시련이든 버티다보면 반드시 시련의 끝에 놓여 있는 경험치를 먹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인내하고 버티는 일은 매번 힘들지만 그 힘든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끝내 승리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뜨거운 폭염을 견뎌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공원의 식물들처럼 우리도 살아남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찾아오지만 어느 누구도 살면서 겪은 고통을 전부 기억한 채 살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픔은 잠잠해지다 마침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작아진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사건 역시 이제까지 그랬듯이 사라지고 잊혀 질 것이다. 길고 긴 무더위 끝에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만나게 되듯 환하게 웃고 행복을 누릴 날이 온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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