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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Mar 25. 2024

circle of life

 집 앞 공원을 가로질러서 가는 길에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자주 보는 얼굴이라 남몰래 깜찍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고양이다. 초겨울에 보고 한참 동안 못 봐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잔디밭 위를 뛰어다니거나 나무 타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오늘은 가만히 누워있었다. 철쭉 덤불 속에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더니 나를 보고 울음소라를 냈다. 직감적으로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체를 숙여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앞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부러져서 관절 반대 방향으로 휘어버렸다. 너무 놀라서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절뚝이며 걸을 때마다 부러진 앞발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길고양이는 엄연한 야생동물이라 나는 먹이를 주거나 따로 돌봐주는 편은 아니다. 책임감 없이 함부로 거두거나 정을 붙이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다친 동물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지인에게 연락하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을 알려줬다. 그러나 점심시간이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자체 산하 보호소에 문의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다. 포획한다면 치료는 해주겠지만 데려갈 사람이 없다면 안락사를 당할 것 같았다. 그때 길고양이를 데려다 소중하게 키우고 있는 동네 미용실 사장님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내가 본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다친 고양이가 있다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깜찍이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온 상태였다.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공원에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미용실 사장님과 친구분이 다친 깜찍이를 발견해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두 사람은 백만 원이 넘는 수술비까지 부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리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골절로 인한 장애가 후유증으로 남아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양이를 비롯한 야생동물은 다치면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는 습성이 있다. 그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한파와 부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불행과 다행은 빛과 그림자처럼 이어져있다.


 생태계는 자동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와 같다. 외부의 개입 없이 알아서 유지된다. 인간이라는 종이 이 땅에 나타나기 전부터 그랬다. 인류가 사라져도 우리를 제외하고 생태계는 변함없이 운영될 것이다. 산과 들에서 태어나는 대부분의 짐승은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때가 되면 사라진다. 사람만이 탄생과 죽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서 집착한다. 다리를 다친 길고양이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극과 극으로 보이는 애정과 혐오 역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에서 나온다. 방향성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사랑과 미움은 온도가 다를 뿐 모양은 비슷하다.


 공원 안에는 물과 먹이를 공급해 주는 작은 고양이집이 여러  있다.  블록 너머에 위치한 구청에도 작은 고양이쉼터가 있다. 길고양이를 유해야생동물로 보는 시각도 있고 구조해야  대상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양쪽 모두 합당한 논리가 있고 납득할만한 일리도 있다.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서 함부로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의 본성이다.


 눈에 익은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낯선 곳에서 똑같은 상황을 목격했다면 똑같이 행동을 했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이므로 답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깜찍이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준 적도 없고 임시보호를 해본 적도 없다. 식객으로 거둬들인 적도 없지만 다행이라고 여기는 마음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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